SK하이닉스가 지난 10일 미국 나스닥시장에 상장했습니다. 공모가는 ADR(미국예탁증서)당 149달러, 조달액은 265억달러(약 40조원)으로 확정됐는데요. 외국 기업의 ADR 발행 기준으로는 2014년 알리바바의 250억달러를 웃도는 역대 최대 조달액입니다.
이번 상장은 SK하이닉스가 ‘한국 메모리주’에서 미국 인공지능(AI) 인프라 대표주로 재평가될지를 가늠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상장 첫날 시장의 평가는 일단 긍정적인 것으로 보입니다. SK하이닉스 ADR은 공모가 대비 13% 오른 168달러에 장을 마쳤습니다. ADR 가격을 현재 환율로 원화로 환산하면 한국 주식 한 주당 252만8000원 정도입니다. 전날 SK하이닉스의 종가보다 16% 가량 높은 수준이죠.
미국 시장에서 기업 가치를 재평가 받아 기술 격차를 유지하기 위한 투자 실탄은 확보했지만, 동시에 그만큼 SK하이닉스를 바라보는 시장의 기대나 미국 정부의 규제 움직임까지도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게 됐습니다. 늘어나는 투자 실탄 만큼이나, 책임감도 무거워지는 셈입니다.
마이크론과 정면 승부···밸류에이션 할인 줄어들까
우선 관심이 쏠리는 건 미국 메모리반도체 업체인 마이크론 대비 SK하이닉스의 밸류에이션 할인이 얼마나 줄어들지 여부 입니다. 지난 1분기 기준 HBM(고대역폭메모리) 점유율은 SK하이닉스 58%, 마이크론 21%로 2배 이상 차이가 납니다. 하지만 10일 기준 12개월 선행 PER(주가수익비율)은 SK하이닉스가 약 5.8배, 마이크론이 7배로 SK하이닉스가 더 낮았는데요. 메모리반도체 시장 점유율은 경쟁사보다 더 높지만 그간 접근성과 지정학적 요소 등으로 상대적으로 박한 평가를 받아온 셈입니다.
그러나 이제 같은 미국 증권시장에서 활약하는 만큼 주가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는 기대가 나옵니다. 필라델피아반도체지수(SOX) 등 각종 시장지수와 ETF에 편입될 가능성도 커졌습니다. 이르면 내년 9월에 SOX 편입이 점쳐집니다. 엔비디아·브로드컴·TSMC 등 대표 AI 인프라 주와 함께 묶이게 되는 것이죠. 미국 ADR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면 한국 주식도 상승 압력이 커질 수 있습니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본부장은 전날 보고서를 통해 “ADR 상장을 계기로 글로벌 투자자의 접근성이 확대되고 향후 미국 ADR과 한국 본주의 밸류에이션이 동시에 재평가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분석했습니다.
ADR 자금으로 초격차 마중물 ‘승부수’, 풀스택 메모리 회사로
ADR로 조달한 자금으로 메모리 반도체 우위를 이어갈 수 있을지도 관전 포인트입니다. SK하이닉스는 이번 ADR로 차입이나 회사채에 의존하지 않고 40조원의 설비투자 자금을 확보했는데요. 이 자금을 국내 반도체공장 증설 속도를 높이고, EUV 노광장비·첨단 패키징 장비를 추가 확보하는 데 활용할 계획입니다.
SK하이닉스는 2022년 업계 최초로 HBM3를 양산해 엔비디아에 공급하면서 시장 주도권을 잡은 뒤로는 줄곧 점유율 1위를 유지해왔지만 최근 후발주자의 추격도 거세지고 있습니다. 삼성전자는 지난 5월 업계 최초로 12단 HBM4E 샘플을 업계에 공급했다고 밝혔습니다. SK하이닉스보다 3주 정도 앞선 일정이었죠. 경쟁에서 뒤처졌던 마이크론도 내년 HBM4E 양산을 목표로 잰걸음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ADR 조달 자금은 HBM 시장의 초격차를 이어나가기 위한 ‘마중물’ 역할을 할 수 있습니다.
이번 상장은 장기적으로는 SK하이닉스의 ‘풀스택 AI 메모리’ 전략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SK하이닉스는 지난 8일 자사 뉴스룸을 통해 “CXL(컴퓨팅 상호연결), HBF(고대역폭플래시), 기업용 SSD를 아우르는 풀스택 AI 메모리 크리에이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습니다. CXL은 AI 가속기와 메모리를 연결해 메모리 창고를 만드는 기술, HBF는 낸드플래시를 여러층으로 쌓아 더 많은 데이터를 적재하는 차세대 메모리입니다.
이 구상에는 AI 인프라가 고도화될수록 HBM 단일 제품이 아닌 시스템 메모리 전반의 설계 능력이 중요해질 것이라는 판단이 깔려 있습니다. 규격에 맞춘 제품 공급 회사에서 벗어나 AI 시스템을 고객사와 함께 설계하는 회사로 진화해나가겠다는 것인데요. ADR 상장은 신시장 개척을 위한 실탄을 마련함과 동시에, 글로벌 AI 메모리 사업자로 인지도를 높일 기회인 셈입니다.
SK하이닉스는 “완성된 제품을 공급하는 역할을 넘어, 고객의 시스템 요구를 이해하고 초기 설계 단계부터 함께 논의하는 기술 파트너로 역할을 넓혀가고 있다”면서 “생산 인프라 투자를 지속해서 추진하는 것은 단순한 설비 확대가 아니라 고객의 AI 시스템 개발 속도에 맞춰 대응하기 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 상무장관 “공장 짓게 하고 싶어” 압박 변수
다만 미국 정부의 압박이 SK하이닉스 구상의 ‘돌발 변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하워드 러트닉 미국 상무장관은 9일(현지시간) 마이크론의 팹 건설 기념식 현장에서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를 미국으로 불러와 생산시설을 짓게 하고 싶다”며 “마이크론이 앞장서고 있으니 경쟁자들은 질투심을 느낄 것이고 결국 따라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한국 대표 반도체 기업들의 미국 투자 확대를 은근히 압박한 것인데, 미국에 상장까지 한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예민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발언이죠. SK하이닉스는 현재 2028년 가동을 목표로 인디애나주에 40억 달러 규모의 HBM 첨단공정 시설을 짓고 있는데 이 공장의 규모를 확대하거나, 시점을 앞당기는 방안도 거론될 수 있습니다.
최태원 SK그룹 회장은 10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열린 기념행사에서 CNBC와 인터뷰하며 “추가 투자도 검토하고 있다”면서 “전력·용수·인력·공급망 등 여건이 갖춰질 경우 메모리 생산공장 공장 생선도 가능하다”고 말했습니다.
최 회장은 올해 초 출간된 ‘슈퍼모멘텀’에 실린 인터뷰에서 “앞으로 10년은 싸움의 전장을 바꿀 것”이라며 “SK하이닉스를 글로벌 중앙 무대로 진출시켜 진짜 회사를 바꿨다는 얘기를 듣고 싶다”고 했는데요. 과연 이번 상장으로 목표를 이룰 수 있을 지 지켜볼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