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R. A Dazzling After-School Afternoon, 2026. 리만머핀 제공
‘주말의 취향’은 지면에 다 담기 어려운 문화 현장의 소식들을 풀어서 전합니다. 마음은 가볍게, 생각은 깊이 할 수 있는 작품을 소개합니다.
커다란 눈동자 안에 작은 우주가 보입니다. 하트와 별, 음표와 화살표, 알록달록한 점들이 동공 위에서 반짝입니다. 볼은 발그레 물들었고, 살짝 벌어진 입은 명랑한 목소리로 인사를 건넬 것만 같습니다. 조금 뒤로 물러서면 검은 단발머리를 한 소녀의 얼굴이 드러납니다. 손가락으로 브이(V)를 그린 소녀 주위에는 라면과 감자튀김, 반창고, 휴대전화, 게임 속 아이콘과 낙서 같은 이미지가 빽빽합니다. 다시 더 멀리서 화면 전체를 보면 일본 만화잡지 표지처럼 보입니다. 굵직한 글자 아래 주인공이 자리하고, 온갖 캐릭터와 기호가 빈틈없이 화면을 채우고 있습니다.
일본 만화 미소녀 캐릭터를 화면으로 옮긴 듯한 이 그림은 일본 작가 미스터(Mr.)의 작품입니다. 서울 한남동 갤러리 리만머핀에서 열리고 있는 ‘계절이 두고 간 것. 음? 날이 개었다.’는 10여 년 만에 작가가 서울에서 여는 개인전으로, 회화와 드로잉, 조각 등 신작을 선보입니다.
1969년생인 미스터는 1990년대 후반 일본의 ‘오타쿠’ 문화에서 가져온 시각 언어를 자신만의 작업으로 전환하면서 주목받았습니다. 무라카미 다카시의 조수로 활동하며 작업을 시작한 그는 일본의 만화와 애니메이션, 게임, 소비문화의 이미지를 현대미술 안으로 끌어들인 ‘슈퍼플랫’ 운동의 주요 작가로도 꼽히는데요. 무라카미가 기획한 2000년 전시 ‘Superflat’에 참여하며 이름을 알렸습니다. 평면적인 화면에 대중문화 이미지를 겹치고, 고급미술과 하위문화의 경계를 흐리는 작업입니다.
Mr., Nodoka - Dyed Bluer Than Indigo, 2026. 리만머핀 제공
무라카미의 작업에 ‘카와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면, 미스터의 그림에선 ‘모에’가 떠오릅니다. 카와이가 두루 귀여운 느낌이라면, 모에는 만화나 애니메이션 속 특정 캐릭터를 향한 강한 애정과 설렘에 가깝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중학생쯤으로 보이는 소녀들이 화면의 중심에 섭니다. 이들의 커다란 눈동자는 현실과 환상이 뒤섞인 심리적 풍경으로 들어가는 통로처럼 기능합니다. ‘노도카―쪽빛보다 푸르게 물든’의 빛나는 눈동자에는 토끼와 하트, 음표와 함께 한글 ‘평화’가 숨어 있습니다. ‘셀카 타임, 주머니 속 500엔’에선 분홍색 머리 소녀 주위로 그래피티와 픽셀 이미지, 음식과 광고 문구가 뒤엉킵니다. 소녀의 옷에서 동일본 대지진 피해 지역을 돕자는 뜻의 ‘동북지원’ 스티커가 눈에 띕니다.
MR. Selfie Time, 500 Yen in My Pocket., 2026. 리만머핀 제공
MR. The Sky That Leads to Tomorrow, 2026. 리만머핀 제공
미스터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밝고 귀여운 캐릭터와 거칠고 추상적인 화면을 병치하며 붕괴와 불안을 다뤄왔습니다. 이번 전시에서도 낙서로 뒤덮인 콘크리트벽을 떠올리게 하는 화면 위로 천진한 소녀의 이미지가 그려집니다. 갤러리 측은 그의 최근 작업이 동시대 사회의 고립과 집단적 상처, 그 속에서 희미하게 남아 있는 낙관의 가능성에 주목한다고 설명합니다.
다만 ‘모에’는 마냥 귀엽게만 볼 순 없습니다. 미성숙한 소녀의 이미지를 애착과 욕망의 대상으로 소비한다는 비판도 가능합니다. 지난 2일 기자들과 만난 작가는 “저 역시 신경 쓰이는 부분”이라며, 자신이 표현하고 싶은 것은 귀엽고 밝은 캐릭터라고 설명했습니다.
이런 불편함까지 염두에 두고 작품을 바라보면, 조금 다르게 보입니다. 화려한 구성과 숨은그림찾기 같은 이미지들 사이로 오타쿠 문화의 욕망과 동시대 사회의 불안, 순수함에 대한 갈망이 함께 드러납니다. 온갖 이미지가 한 화면에 겹쳐 있듯, 미스터의 작품도 귀여움과 불안, 애착과 대상화가 포개진 여러 층위로 읽힙니다.
‘계절이 두고 간 것. 음? 날이 개었다.’ 전시 전경. 리만머핀 제공
‘계절이 두고 간 것. 음? 날이 개었다.’ 전시 전경. 리만머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