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춧가루를 떠올리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생각할까? 답은 처한 입장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농민은 얼마나 많이 생산할지를, 조리사는 요리에 맞는 굵기를, 소비자는 원하는 맵기를 먼저 생각한다. 예전의 나 역시 맵기나 원산지를 기준으로 골랐다. 하지만 지금은 향과 맛을 더해 고른다.
고춧가루의 단맛과 달곰한 향? 고춧가루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낯선 용어다. 토종 고추를 알기 전 과거의 나도 그런 것이 있는지 몰랐다. 어느 날 우연히 맛본 토종 고춧가루의 맛이 무척 좋았다. 괴산 유기농 전시회에서 한 봉지를 산 것이 인연의 시작이었다. 그 뒤로 화천재래초, 음성재래초, 붕어초, 수비초 등 다양한 토종 고추를 알게 되었고, 기회가 닿을 때마다 맛을 봤다.
고춧가루 향을 맡는다고 상상하면 매운 향부터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토종 고추는 달곰한 향이 있다. 같은 고춧가루라도 향에서 차이가 난다. 이러한 차이는 현대의 고추 품종 개량이 생산성, 굵기, 맵기 등 외적인 요소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세상 이치는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게 있는 법이다. 현대의 고추는 생산성을 얻는 대신 향을 잃었다. 매운 향은 남았지만, 그 속에 함께 나던 달큼하고 맛있는 향은 사라졌다.
몇해 전 영양 오일장을 취재한 적이 있다. 토종 고추 가운데 수비초라는 것이 있다. 이 품종은 영양군 수비면에서 오랫동안 재배해온 고추로, 모양이 칼처럼 생겼다고 해서 ‘칼초’라 불린다. 영양에 간 김에 수비초도 함께 취재했다. 그곳에서 사온 토종 고춧가루는 칼칼한 맛에 달큼한 맛도 났다. 은은한 단맛이 매운맛의 향연을 단단하게 받쳐줬다. 덕분에 속도 편안했고 음식의 완성도도 한층 높아졌다.
이러한 경험은 필자가 식당에서 일할 때 빛을 발했다. 중국산이 판치는 요식업에서 과감히 토종 고춧가루를 사용했다. 샐러드에 식초와 단맛을 더한 뒤 토종 고춧가루를 곁들였다. 찌개나 볶음요리에도 사용했다. 손님의 반응은 내가 느꼈던 것과 다르지 않았다. “맵지만 속이 편안한 매운맛”이라 평가했다.
몇달 전, 집에서 먹던 토종 고춧가루가 다 떨어져 급히 한 봉지를 샀다. 떡볶이를 만들었는데 생각한 맛이 아니었다. 재료를 차근차근 살폈다. 설탕, 마늘, 대파, 간장, 고추장, 고춧가루까지 넣을 건 다 넣었다. 다시 맛을 봤지만 여전히 달랐다. 곰곰이 생각한 끝에 고춧가루가 바뀐 것을 그제야 알아챘다. 매운맛은 비슷했지만 그저 맵기만 했다. 설탕이 내는 단맛은 고춧가루가 매운맛과 함께 내던 단맛과 달랐다. 단맛의 한 축이 빠지자 요리의 결과도 달라졌다.
생산성도 중요하고, 용도에 따른 굵기나 매움의 정도도 중요하다. 김치를 담글지, 짬뽕을 만들지에 따라 알맞은 고춧가루를 선택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만 그에 못지않게 고춧가루가 가져야 할 근본적인 식재료로서의 가치도 생각했으면 한다. 식재료는 기본적으로 향이 있어야 한다. 물론 매운 향은 어떤 고춧가루에나 있다. 내가 말하는 것은 생산성을 위해 포기했던 달곰한 향이다. 식재료는 본연의 향이 날 때 빛이 난다. 지금은 반쪽짜리 향이 나는, 생산성이 좋은 것을 으뜸으로 친다. 매운 향뿐 아니라 달곰한 향까지 품고 있어야 으뜸 고춧가루다. 지금의 으뜸은 향의 기준에서는 버금에 머물러 있다.
김진영 31년차 식재료 전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