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롱과 혐오는 민주시민의 핏줄에 흐른다. 우리는 한때 호헌철폐와 독재타도만 외친 게 아니다. 권력자를 설치류나 조류에 빗대어 조롱했고, 부패의 조무래기와 타락의 앞잡이를 비루하다고 경멸했다. 때로 슬픔도 힘이 되듯, 증오는 물론 조롱과 혐오마저도 공화정의 적과 민주정의 기생자를 규탄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소린가. 혐오는 자유가 아니란다. 이 표현은 일단 조롱과 혐오를 뒤섞는 듯 보이며, 혐오와 증오마저도 구별하지 못하는 듯 보이기에 둔감하게 느껴진다. 그런데 둔한 감수성에 비하면 발언의 자유라는 중요한 시민권을 제한하려는 그 기세는 모질기 짝이 없다. 정작 그렇게 허용하지 않겠다는 발언이 마음의 상태에 대한 것인지, 재현 방식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발언 행위의 효력 그 자체인지부터 애매하지만 말이다.
발언자도 모를 가능성이 높다. 또는 알면서 무시하려는 처사일 수 있다. 예컨대 혐오와 자유를 엮은 단순부정문을 구호처럼 유통해서 일단 다른 시민의 자유를 제한해 보자는 간특한 의도로 하는 말일 수 있다. 어쨌든 상관없는데, 왜냐하면 그 발언도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발언이 조잡하고 허술하여 절로 듣는 이에게 격한 반감을 유발하니 불편하다거나, 부당하게 자유의 한계를 좁혀서 시민권을 제한하니 위험하다거나, 아니면 어차피 효력도 없는 아무말 대잔치이니 무시하면 좋겠다거나 하면서 또 다른 발언으로 대항할 수 있을 뿐이다.
발언들은 서로 벼려진 후에야 그 진가를 내보인다. 이는 1644년 밀턴이 <아레오파지티카>에서 밝힌 바다. 덧붙이자면 한 사람에게 자명한 자유로운 소통의 경계가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다원적 사회에서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모욕감을 완전히 회피할 수 있는 안전지대란 따로 없다. 때로 어떻게 표현해도 부당하고 가혹하다는 느낌을 떼어낼 수 없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일단 소통하는 수밖에 없다. 자유로운 소통의 경계를 서로 확인하기 위해서라도 그렇다. 안심할 수 있는 표현의 방식을 찾기 위해서도 그렇다. 부적절하게 들리지만 꼭 필요한 주장을 검토하기 위해서라도 서로 발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나도 일단 배재고 학생들이 노래한 ‘스타벅스 가야지’는 과도하다고 보았다. 그래서 만약 미리 합의한 바가 있다면 그에 따라 적절하게 꾸짖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종류의 자유의 한계에 대해 합의한 적이 없다는 것을 상기해야 한다. 지금 처벌은 당연하며 그것도 잔인하고 과시적으로 해야 한다는 규제론자들이 오히려 위험해 보인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민주정에서 채택한 법률이 강제력을 갖는 이유는 민주정에서는 모든 시민이 자유로운 발언을 통해 법률을 만드는 과정에 기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되기 때문이다. 발언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은 공론장에서 토론도 없이 처벌에 합의했다고 주장하는 것만으로 민주적 질서를 정당화할 수 없다. 공론장에서 내용을 이유로 삼아 특정 발언을 제한하는 일은 그 공론장이 의제로 삼고 대안을 마련, 시민의 동의를 구하는 정책 결정과정을 오히려 방해한다. 조롱과 경멸, 증오와 혐오를 일괄 규제해야 한다는 주장은 그 자체로 정합한 논변이 될 수도 없고, 공론장의 합리적 토론의 경계를 축소하기에 위험하다.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