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센터 연구원이 원통형 CT 검사대에 놓인 보물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을 살펴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굵은 케이블과 검은 구조물이 얽힌 거대한 원형 장비가 SF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하지만 검사대에 놓인 것은 가부좌를 튼 황금빛 불상. 높이 약 120㎝에 너비가 82㎝에 달하는 보물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이다. 방사선 조사실의 두꺼운 차폐문이 닫히고 경고음이 울리자 원형 장비가 서서히 돌기 시작했다. 차폐문 밖 모니터에 조사실 내부 풍경과 불상 내부 모습이 실시간으로 떠올랐다. 불두의 나발 사이로 나뭇결이 드러났고, 귀 부근에 박힌 검은 못과 눈·코·입의 형상이 투명하게 겹쳐 보였다.
1622년 광해군 때 왕실 발원으로 조성된 이 불상의 밑바닥 복장공(불상 내부에 경전이나 사리 등 성물을 넣기 위해 만든 공간)에선 각종 복장물이 발견돼 제작 시기와 봉안 내력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부 구조나 제작 방식처럼 안을 살펴야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은 연구하기 어려웠다. 기존 CT(컴퓨터단층촬영) 장비로는 이처럼 큰 유물을 촬영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조사에서 불상의 몸통을 통나무로 만들고 얼굴과 정수리 부분을 따로 제작해 붙였으며, 등에는 판재 두 장을 끼워 넣은 구조를 새롭게 확인했다. 머리 부분에 종이나 직물로 추정되는 복장물이 남아 있는 사실도 처음 찾아냈다.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센터가 세계 최대 원통형 CT 장비를 국내 최초로 도입하면서다.
국립중앙박물관은 대형 문화유산을 훼손하지 않고도 내부 구조와 손상 상태를 정밀하게 파악할 수 있는 대형 CT 장비를 도입했다고 14일 밝혔다. 이번에 도입한 장비의 검사대는 5m로, 최대 직경 1100㎜·길이 3000㎜ 유물까지 수용할 수 있다. 비슷한 장비를 가진 일본 도쿄국립박물관보다 수용 가능 직경이 100㎜ 커서 세계 최대 규모로 파악됐다.
원통형 CT로 촬영 중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불두 내부가 모니터에 투과 영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센터 연구원이 원통형 CT로 촬영한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의 내부 구조와 제작 방식을 설명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기존 CT 장비와 가장 큰 차이는 유물 자체를 움직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존 수직형 CT는 유물을 검사대에 고정한 뒤 회전시키는 방식으로 촬영 크기가 직경 600㎜·높이 1400㎜로 제한됐고, 발굴 직후 수습됐거나 물리적으로 취약한 유물은 조사하기 어려웠다. 반면 새 원통형 CT는 유물을 그대로 둔 채 X선 발생 장치와 검출기가 약 220도 회전하고 수평으로 이동하며 최대 1만장의 영상을 촬영해 3차원 이미지를 만든다. 장비는 450kV 전압과 700W·1500W 출력을 사용하며, 검출기 해상도도 기존 400만 화소에서 1300만 화소로 높아졌다.
박물관은 기존 나노 CT와 600kV CT에 원통형 CT를 더하면서 소형 고대 장신구부터 대형 목조불상, 보존 상태가 불안정한 발굴 수집품까지 아우르는 조사 체계를 갖추게 됐다. 전통 목가구 등 목재 문화유산의 내부 나이테도 훼손 없이 조사해 연륜연대를 측정하는 연구에 활용할 계획이다.
독일에서 주문 제작한 장비 가격만 23억원, 차폐 시설을 포함하면 35억원이 들었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은 한국 보존과학 태동 50주년에 맞춰 도입한 이번 장비를 흑백TV에서 컬러TV로 넘어가는 도약에 빗댔다. “1976년에는 이쑤시개 같은 도구로 시작했고, 1980년 X선을 들여오며 비로소 보존과학실다운 장비를 갖췄다. 2004년 공주 수촌리 출토 금동신발을 흙덩어리째 수습해 현미경으로 일일이 걷어내던 때, 서울대병원 CT로 내부 형태와 두께를 확인하며 장비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2017년 박물관에 처음 CT가 들어왔을 때도 큰 감동이었지만, 이번 원통형 CT는 이쑤시개 같은 도구로 시작한 시절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한국 보존과학의 수준을 보여주는 K컬처의 한 증표가 될 것이다.”
유홍준 국립중앙박물관장이 14일 국립중앙박물관 보존과학센터에서 새로 도입한 원통형 CT 장비를 소개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