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과학 서적 <광장 비판: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 표지.
경기도의 한 공공도서관이 특정 사회과학 서적을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로 분류해 시민의 도서구매 요청을 거부한 것으로 파악됐다. 도서 목차에 ‘민주주의’ ‘자유’ 등의 단어가 있다는 이유에서다. 출판사는 “도서 검열”이라며 반발하고 있다.
14일 경향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경기도 화성시립남양도서관은 지난 3일 <광장 비판: 민주주의에 대해 우리가 말하지 않는 것>(코라초프레스)을 도서관에서 구입해 달라는 A씨의 요청에 대해 반려 결정을 내렸다. 이 책은 12·3 불법계엄 선포와 이후 윤석열 당시 대통령 탄핵 정국을 거치면서 나타난 ‘광장 민주주의’의 한계와 문제점을 다룬 사회비평서다.
A씨는 지난 1일 도서관에 미소장 자료 구입을 요청할 수 있는 ‘희망도서 서비스’로 이 책을 신청했다. 반려 사유로 도서관은 자체 ‘희망도서 제외 기준’ 중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에 해당한다는 이유를 들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박영신 코라초프레스 대표가 도서관에 구체적인 반려 사유를 문의했다. 도서관 관계자는 “표지와 목차에 ‘민주주의’나 ‘자유’ 같은 단어가 포함되어 구입을 일시 반려했다”고 답변했다.
이 도서는 다른 공공도서관에서 이미 구매해 비치한 사례가 있다. 박 대표는 도서관의 결정을 두고 “헌법의 근간이자 보편적 가치를 담은 단어들이 특정 정치사상으로 취급돼 기계적으로 분류·검열된 것”이라며 “이런 희망도서 제외 기준은 거대한 학문적 개념 자체를 포괄적으로 규제하는 독소 조항”이라고 말했다. 이 책의 저자 중 한명인 천정환 성균관대학교 교수도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라는 기준을 누가 어떻게 판단할 것이냐”며 “이런 기준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자유주의적 입장에서 보면 문제가 된다”고 했다.
화성시립남양도서관 이용객이 받은 희망도서 신청 반려 통지 내용에 반려 사유가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로 명시되어 있다. 독자 제공
도서관은 통상적인 절차라는 입장이다. 도서관 관계자는 “희망도서는 빠른 처리를 위해 소장 여부와 도서 정보만 간단히 확인하고 신속히 구입하는 시스템”이라며 “서명과 목차 등 제한된 정보만 보고 일차적으로 판단하는 과정에서 생긴 일”이라고 했다. 이어 “도서 소개글 중 ‘윤석열과 그 일당에 의해’ 등의 문구를 확인해 내부 심의위원회를 거쳐 구입 여부를 결정하고자 보류한 것”이라며 “다음달 위원회 심의를 통과하면 정기도서로 구입해 비치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를 판정할 구체적인 내부 매뉴얼이 있는지에 대해 이 관계자는 “현재는 국립중앙도서관의 장서 개발 지침 등을 참고해 판단하고 있다”고 답했다.
박 대표는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 조항을 희망도서 제외 기준에서 삭제하고, 자의적 도서 검열 재발 방지 대책을 수립할 것 등을 촉구하는 내용의 ‘시정조치 요구서’를 도서관에 제출했다. 책의 저자 중 한 명인 조형근 작가는 “이번 사태는 의도적인 정치·사상 검열이라기보다 실무자 입장의 편의주의적 판단에 가까워 보인다”며 “이번 사태가 공공도서관이라는 공간이 서로 다른 다양한 의견을 어떻게 포용하고 사상의 자유를 함께 누릴 수 있을지 논의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기도 화성시립남양도서관 홈페이지에 게시되어 있는 희망도서 제외 기준에 ‘사상·정치 목적의 자료’가 포함되어 있다. 화성시립남양도서관 홈페이지 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