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자공이 스승 공자에게 여쭸다. “평생 행해야 하는 한 글자가 있다면 무엇입니까?” 그러자 공자는 용서라는 뜻인 ‘서(恕)’를 제시했다. 자공이 꽤나 의아했을 법하다. 스승이 늘 강조한 것은 용서가 아니라 인(仁), 곧 어짊이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공자는 그토록 중시했던 어짊이 아닌 용서를 그 답으로 제시했다. 공자가 용서를 어짊만큼이나 중시했던 것이다. 훗날 최초의 사전다운 사전인 <설문해자>에서 용서가 어짊이라고 명토 박힌 까닭이다. 그런데 용서가 어짊이라는 말의 실상은 무엇일까? 어짊에 해당하는 행위가 자못 다양해서 하는 말이다. 다행히도 그 답은 쉬이 찾을 수 있다. 공자가 용서라고 답한 후 바로 “자신이 원치 않는 바를 남에게 베풀지 말라”(<논어>)는 예를 들어서이다.
공자는 이처럼 용서를 하는 것으로 제시했다. 가령 자기 마음을 토대로 타인의 마음을 헤아린다, 자신에게 불편한 바는 남에게 요구하지 않는다 등과 같이, 용서는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래서인지 오늘날 용서의 뜻이 달라졌어도, 그러니까 피해자가 가해자의 잘못을 더는 문제 삼지 않고 덮어준다는 뜻으로 쓰여도, 용서는 여전히 받기가 아니라 하기 차원에서 주목한다. 하여 가해자가 사과하면 피해자가 용서해줘야 마땅하다고까지 여긴다. 그런데 사과가 과연 용서의 정당한 근거일 수 있을까?
용서는 주로 말이나 행동을 매개로 이뤄진다. 용서를 하든 받든 그 근거는 말 또는 행동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전제는, 서(恕)라는 글자나 공자가 든 예에서 알 수 있듯이 말이나 행동에 마음이 담겨야 한다는 점이다. 가해자의 잘못을 덮어주려면 가해자의 말이나 행동에서 그가 진정으로 반성한다는 마음이 느껴져야 비로소 용서가 성립된다는 얘기다. 문제는 마음으로 진정 반성한다는 것을 어떻게 입증하느냐이다.
그래서 용서는 일회성 언행을 근거로 해서는 안 된다. 진정으로 반성하는 마음은 일관된 행동을 통해 입증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잘못한 행위를 바로잡고, 바로잡은 행위를 지속적으로 행해야만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용서는 하기가 아니라 받기가 핵심이다. 일회성 언행이 아니라 지속되는 과정을 통해 용서를 받아야 하기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