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센느 원이 ‘무섭노’ 발언 논란이 보여준 혐오의 탈정치화
한동안 스타벅스의 5.18 조롱 논란—호남 반도체 산단—배재고의 광주제일고 모욕—경상도 사투리 논쟁이 연이어 터지면서 문제를 마구 부풀렸다. 경상도 사투리 논쟁은 경남방송의 김현지 PD가 최근 화제의 아이돌 ‘리센느’의 원이가 등장하는 영상의 사투리 표현에 속상함을 토로하며 시작되었다. PD와 해당 아이돌은 보통 설명 의문문에서 쓰이는 ‘~노’체를 평서문에서 사용했다. 미디어에서 틀린 사투리를 보는 것은 흔한 일이다. 문제는 이런 말투가 우리 사회에서 ‘일베’의 언어로 인식된다는 점, 그리고 사용자인 원이가 거제 출신이라는 점이다. 지역민의 사투리가 또 다른 지역민에게 ‘틀린 용례’, 그래서 오염된 언어로 들린다? 이 긴장 사이에 공동체가 성실하게 논의해 볼 만한 사안이 있다. 그런데 온라인 환경에서 이 문제는 즉각 ‘이제 막 뜨는 여자 아이돌에게 일베 낙인을 찍으려 했다’라는 프레임으로 전환되며 이분법에 갇혔다. ‘무엇이 진짜’ 사투리냐는 논쟁은 아이돌이 일베어를 쓰는 가해자인가 아니면 PD가 무고한 사람에게 낙인찍는 가해자인가를 겨루는 진실게임이 됐다. 진실보다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을 주도하는 ‘탈진실(Post-truht)’ 시대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결국 PD가 애먼 사람 잡았다는 서사가 완성됐다. 하지만 이것은 누구의 ‘잘못’이 아니다. 둘 다 잘못이 없어도 문제는 발생할 수 있다. 함께 들여다봐야 할 지점은 복잡하고 다층적이다.
지금껏 그렇게 많은 경상도 사투리가 미디어에 넘쳐났는데 지역민들이 보기에 어색한 사투리라는 논란이 이번에 왜 처음 터졌는가, 그 언어가 ‘왜’ 하필 ‘~노’체인가, 경상도 사투리는 왜 혐오의 언어와 밀접해졌는가, 그 배경에는 어떤 정치적‧사회문화적 맥락이 얽혀 있는가, 어떤 세대 차이‧경험 차이가 해석을 결정하는가, 지금의 지역혐오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를 두루 짚어야 한다. 이 논의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오래 고민했다. 미디어의 사례는 피상적이고, 국어국문학과 박사 학위를 갖고 있지만 어학 및 방언 전공자가 아니라 학술적 접근도 적절하지 않다. 그렇다면 경상도 방언 사용자라는 삶의 ‘이야기’에서 출발해야겠다. 이처럼 저마다의 맥락에 연루된 문제를 다루려면 쓰는 사람 역시 자신의 위치를 드러내야 하는 법이다.
나는 경상남도 창원 출신이다. 2007년에 서울로 왔고 본가는 아직 창원이다.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급속히 망가져 가는 내 고장의 사투리를 실시간으로 지켜보았다. 초기에 ‘일베’는 실체 있는 무언가였다. 약자에 대한 혐오를 주정서로 삼는 특정 사이트의 이용자를 칭했다. 그들은 아무데나 ‘~노’를 붙였고, 그러니 어법에 맞지 않는 ‘~노’체를 쓰면 일베라는 증거였다. 2010년대 초반까지는 이런 ‘이기노야체’를 사회가 경계하고 지양했다. 경상도인들도 조심스러워했고, ‘너무너무’를 ‘노무노무’로 쓴 운동선수나 연예인이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처음으로 비경상도 지인들에게 ‘~노’와 ‘~나’의 차이가 무엇인지 질문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 악질적 전유는 ‘재미있으면 그만’이라는 정서의 남초 사이트 등지로 퍼지면서, 점점 사용량이 늘어갔다. 2016년, 메갈리아로부터 퀴어 혐오 문제로 분리되어 나온 워마드가 ‘일베를 미러링’한다는 전략으로 이기노야체를 적극적으로 차용하며 ‘~노’체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금기시되는 이기노야체를 여성이 쓴다는 데서 오는 낯섦과 위악이 주는 해방감, 그것이 주로 ‘명목상’ 가부장제를 공격하거나 조롱하는 발언에서 쓰인다는 점이 방패로 작동하며 이기노야체는 대대적인 이미지 세탁에 성공했다. 어딘가 반골 기질을 띤, 유쾌하고 힘이 센 언어로 여겨진 것이다. 이는 곧 SNS로 무분별하게 퍼져나갔다.
이제 인터넷 환경이 친숙한 젊은 세대에게 이기노야체는 지역인들의 고유한 언어도, ‘일베의 언어’도 아니다. 혐오의 의도로도 쓰지만, ‘쓰고 싶으면 쓸 수 있는 밈’ 정도로 탈정치화되었다. 이것이 일베가 궁극적으로 추구한 방향이다. 혐오를 일상화해서, 재미있는 놀이로 만들어서, 누군가를 배제하고 낮잡아 보는 데 일말의 죄책감도 남기지 않기. 누군가 지적하면, ‘나’는 ‘자유를 침해당한 피해자’라고 느끼게 만들기. 커뮤니티이자 실체로서의 일베는 죽은 지 오래다. 대신 일베의 가치였던 약자혐오와 나르시시즘이 일상 속으로 깊이 침투했다. 그런데도 일베를 구별할 수 있고, ‘나’는 일베가 아니니 혐오를 할 리 없다고 천진난만하게 믿는다. 나는 ‘차별에 분노하는 글에도 쓰인 엉망진창 이기노야체’를 보며, 때로는 그것이 기상천외하게 틀린 맞춤법처럼 보여서 픽 웃어버린 적 있다. 이기노야체로부터 아무것도 공격당하지 않는 위치였기에 가능한 반응이었다. 이러한 방관과 놀이가 ‘~노’체의 체급을 무럭무럭 키웠다. 그 속에서 성장한 젊은 세대의 사투리는 그래서, 이기노야체가 밈화되기 전과 후를 다 경험한 지역민들에게 위화감을 선사한다. 여기에까지 ‘~노’체를 쓴다고? …이상한데?
사투리는 언어이기에 체계와 규칙이 있고, 시대와 상황에 따라 자연스레 변화한다. 그리고 한국인도 문법을 틀리듯 일부 지역민도 사투리를 규칙과 다르게 쓴다. 누군가는 이상하게 느끼고, 누군가는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다. 하지만 특정 변형이 혐오의 놀이화에 이용된 후 사용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면, 더는 언어학적 문제가 아니다. 김PD가 비난이나 판단이 아닌, ‘속상함’이라는 단어를 쓴 것도 이 때문이다. 무작정 ‘지역민이 쓰면 다 옳은 사투리다’라고 주장하는 것은 언어로서의 사투리를 무시하고, 정치적 맥락을 제거하는 무지성이다. 용례에 맞게 쓰면 모두 옳은 사투리라고 주장할 수 없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배재고는 정확한 설명 의문문 형태로 ‘~노’체를 써서 광주제일고를 공격했다. 비경상도인이 경상도의 언어를 쓰는 것만으로 호남혐오의 기능을 수행한다는 사실은 거칠게 두 가지를 의미한다. 첫 번째는 비경상도인들이 호남혐오에 경상도 언어를 이용한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경상도가 호남에 대한 구조적 가해자성을 띤다는 것이다. 구조적 가해자성은 의도나 개개인의 실천과는 무관하게 실재하고 상대적이다. 서울이 다른 지역의 물을 끌어다 쓰고, 서울의 쓰레기를 지역에 떠넘기기 때문에 서울 시민이 앉아서 숨만 쉬어도 다른 지역에 가해자성을 띠듯이, 선량한 남성이 밤길을 걸을 때 그 앞에 가는 여성의 공포가 망상이나 허상이 아니듯이. ‘나’나 ‘우리’는 안 그랬다는 주장은 여기서 의미가 없다. 구조적 가해자성이 있다는 것이 곧 천하의 죽일 놈이라는 뜻은 아니니 방어적인 태도는 잠시 내려놓자.
이기노야체와 일베라는 사이트가 없을 때에도 ‘라도’, ‘깽깽이들’, ‘폭도’ 같은 혐오 표현이 쓰였고 DC 인사이드 등지에서 ‘~랑께’, ‘홍어’, ‘슨상님’이 쓰였다. 바톤 터치를 하다가 특정 시기, 특정 사이트 이용자들이 이번에는 경상도 사투리를 골랐다. 정치적으로 소수자였던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한 그 표현은 드물게 지방의 패권자인 경상도의 것을 차용했다. 그런데 다른 혐오표현과 달리 유난히 생명력이 길고 파급력이 셌다. 일베만 쓴 게 아니라서, 오히려 ‘낙인 찍히면 끝인’ 나쁜 타자로서의 일베가 아니면 무고하다고 믿은 ‘~노’체 사용자 덕분에, 경상도 사용자들이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기에, 왜냐하면 자신의 언어가 혐오의 도구로 사용되어도 큰 불이익을 겪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인식하지 못한 권력이기에…계속되었다. 마침내 ‘~노’ 체가 ‘~고’, ‘~나’, ‘~디(부산)’, ‘~데이’ 같은 다양하고 고유한 사투리 어미와 평범한 ‘~네’까지 다 잡아먹는 지경까지 왔다. 그러니 지역 출신 화자조차도, “도시고!” 또는 “도시데이!”라고 말해야 할 때 아무 악의 없이 “도시노!”라고 외쳐버리는 것이다.
이 논란을 ‘검열’, ‘탄압’, ‘일베 낙인과 피해자 양산’이라는 직관적인 프레임으로 소비하고, 문제 제기자를 악당으로 만든 결말이 안타깝다. 이는 그동안 사회가 ‘일베’와 ‘일베 아닌 것’을 양분하고, 곳곳에 뿌리내린 혐오 문제를 일베에게 몰아준 업보이기도 하다. 앞으로 같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터이니 더 나은 방향을 고민해야 한다. ‘나’가 느끼는 감정과 취할 수 있는 태도를 자신의 정체성, 위치와 연결지어 고찰하자고 제안한다. 이기노야체가 전국적인 놀이가 된 상황에서 ‘도저히’ 이 말을 쓰지 못하고, 그것이 함의하는 차별과 배제 때문에 고통받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도 ‘나’는 ‘~노’체가 여전히 재미있어서 계속 쓰고 싶다면, 정확하게 쓰자는 말이 검열처럼 느껴진다면, 이 감정의 격차는 어디서 기인할까? 출신지, 계층, 계급, 성별, 나이, 그리고 관계 맺는 대상과의 역학 관계 등등 많은 것이 관여한다. 이를 바탕으로 자신의 해석이나 가설이 진실이라고 믿는 오류에서 한 발 물러설 수 있다. 서로 상충하는 것처럼 보이는 진실이 공존하는 이유를 면밀하게 살펴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