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플릭스 등에서 방영 중인 인기 아동 애니메이션 <마샤와 곰>의 한 장면. 주인공 소녀 마샤가 착용한 모자가 구소련 시대 군복을 연상 시켜 논란이 되고 있다. 엑스 갈무리
이달 초 영국에서는 곰 한 마리로부터 시작된 ‘아동의 군사화’ 논란이 일었다. 넷플릭스 등에서 방영되고 있는 인기 아동 애니메이션 <마샤와 곰>에 등장하는 곰 때문이었다.
<마샤와 곰>은 어린 소녀 마샤와 친구인 갈색곰이 외딴 숲속에서 모험을 펼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문제가 된 것은 마샤의 복장과 곰이 지닌 상징성이었다. 곰은 러시아를 상징하는 대표적 동물인 데다, 극 중 마샤가 곰의 당근밭을 훔쳐 먹으려는 토끼를 쫓아내기 위해 쓴 모자 역시 구소련 시대 군복을 연상시킨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톰 고든 영국 자유민주당 의원 등 초당파 의원 50여명은 이 작품이 러시아의 선전물로 보인다며 방영 금지를 촉구하는 서한을 의회에 제출했다. 우크라이나 허위정보대응센터와 에스토니아 외교부도 우려를 나타냈다.
넷플릭스 등에서 방영 중인 인기 아동 애니메이션 <마샤와 곰>의 한 장면. 주인공 소녀 마샤가 착용한 모자가 구소련 시대 군복을 연상 시켜 논란이 되고 있다. 튀르키예 온라인 커뮤니티 엑시 셰일레르 갈무리
구소련 시대 군인들이 착용한 모자. 튀르키예 온라인 커뮤니티 엑시 셰일레르 갈무리
영국 일간 가디언은 15일(현지시간)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100년 넘게 정치·전쟁의 선전 도구로 활용돼 온 역사를 조명했다.
선전 만화의 시작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데이비드 웰치 켄트대 현대사 명예교수는 “당시 모든 참전국이 만화를 활용했다”며 적국을 희화화한 작품들이 큰 인기를 끌었다고 말했다. 대표적 사례로는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를 소시지로 변한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묘사한 영국 유명 애니메이터 랜슬롯 스피드의 작품이 있다.
선전 만화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팔다리를 쭉쭉 뻗으며 걷는 슬랩스틱 동작의 캐릭터가 유행하던 1940년대 초반의 만화 산업은 흥미 위주의 선전물을 제작하기에 적합했다. 이 시기에는 디즈니와 워너브러더스 등 대형 애니메이션 스튜디오가 등장한 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워너브러더스는 아돌프 히틀러와 베니토 무솔리니, 도조 히데키를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오리로 묘사한 애니메이션 <더 덕테이터스>를 제작했다. 이들 오리는 결국 벽난로 선반 위에 올려진 박제품 신세로 전락한다.
워너브러더스가 1942년 제작한 애니메이션 ‘더 덕테이터스’의 한 장면. 일본 전시내각 총리였던 도조 히데키를 연상시키는 캐릭터. 엑스 갈무리
특히 디즈니는 미국 정부를 위해 여러 편의 선전 애니메이션을 제작한 것으로 유명하다. 대표작으로는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총통의 얼굴>이 있다. 극 중 도널드 덕은 나치 독일에서 살아가는 악몽을 꾼다. 수십 장의 히틀러 초상화를 향해 나치식 경례를 반복하던 도널드 덕은 결국 지치게 되는데, 이후 꿈에서 깨어난 그는 자유의 여신상 모형에 입을 맞추며 “미국의 시민이라니 정말 기쁘지 아니한가”라고 외친다.
이 시기 미국에서 제작된 선전 애니메이션 상당수는 특정 인종을 차별적이고 모욕적으로 묘사했다. 현재 상영이 금지된 워너브러더스의 <벅스 버니 닙스 더 닙스>에서는 일본인을 비하하는 표현이 사용됐다.
연합국만이 선전 만화를 활용한 것은 아니었다. 추축국 시절 이탈리아는 1941년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를 털이 많고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악당으로 묘사한 애니메이션 <처킬 박사>를 제작했다.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던 프랑스 남부 괴뢰 비시 정권이 제작한 애니메이션에서는 연합군의 상륙이 재앙으로 묘사된다. 미키마우스와 도널드 덕, 뽀빠이 등 미국 만화 캐릭터들이 사람들에게 폭격을 가하는 장면도 등장한다.
추축국 시절 이탈리아가 제작한 애니메이션 <처킬 박사>의 한 장면. 소설 <지킬 박사와 하이드>의 설정을 차용한 이 작품은 윈스턴 처칠 전 영국 총리를 악당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튜브 제공·가디언 갈무리
냉전 시기 선전 만화는 단순한 군사적 충돌을 넘어 이념적 대립에 초점을 맞췄다. 1954년 제작된 영국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동물농장>은 조지 오웰 원작 소설과 달리 농장 동물들이 돼지들에게 반란을 일으켜 성공하는 결말로 마무리된다. 이는 공산주의 정권의 전복을 암시하는 것으로 해석됐다. 훗날 이 작품이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자금 지원을 받아 제작됐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2000년대 이후에도 만화를 활용한 전쟁 선전은 계속되고 있다. 최근 사례로는 미·이란 전쟁 기간 이란이 생성형 인공지능(AI)을 활용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를 악당으로 묘사하는 영상을 제작해 SNS에 유포한 일이 꼽힌다.
크리스티안 폴데스 체코 카렐대 강사 겸 연구원은 “지난 15년 동안 전쟁 애니메이션이 증가했다”고 말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도 “양국 모두 국가를 어린이로 의인화하고 피해자와 가해자, 영웅과 악당의 서사 구조를 활용하며, 허구적 이야기와 실제 사건을 결합하기도 한다”고 분석했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이후 어린이들에게 친숙한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통해 이른바 ‘슬로파간다’(sloppaganda)가 확산하고 있다는 비판도 나온다. 슬로파간다는 AI를 활용해 질 낮은 콘텐츠를 대량 생산하고 이를 통해 대중을 선동하는 행위를 뜻한다. 폴데스는 최근 선전물이 확산하는 주요 경로인 SNS 알고리즘이 텍스트보다 시각 자료 중심의 만화 콘텐츠와 특히 잘 맞아떨어진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