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수박여름물김치
냉방 기술이 없던 시절, 사람들은 제철의 맛으로 여름을 났다. 여름 과채로 수분을 보충하고 발효 음식으로 기운을 북돋웠다. 선조들의 여름 밥상에 물김치가 빠지지 않았던 이유다. 사찰에서는 수박도 물김치로 담가 계절의 갈증을 달랬다. 달콤한 수박이 개운한 물김치에 녹아들며 식탁 위 감초 역할을 했다.
수박은 생각보다 오래된 우리 여름 식재료다. 고려 말 원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전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조선시대에 들어 전국적으로 재배되기 시작했다. 조선 후기 풍속을 기록한 <동국세시기>에는 수박과 참외가 대표적인 여름 과실로 등장하고, 부녀자들의 생활 백과였던 <규합총서>에도 여름철 과채를 이용한 저장 음식과 물김치 조리법이 여럿 기록돼 있다.
냉장고가 없던 시절 사람들은 여름 과일과 채소를 오래 즐기기 위해 발효의 지혜를 빌렸다. 오이와 참외는 물김치가 되었고, 먹고 남은 수박 껍질은 장아찌와 나물로 다시 태어났다. 버리는 부분이 거의 없는 음식 문화였다.
이번 절로미식회는 김천 송학사 주지 주호 스님이 소개하는 ‘수박여름물김치’다. 붉은 수박과 방울토마토가 떠 있는 모습은 여름 디저트 화채처럼 보인다. 하지만 맛을 보면 달달함보다 청량함을 머금은 김치다.
비밀은 풀국에 있다. 묽게 쑨 밀가루죽이 국물 속 미생물의 먹이가 되면서 천천히 발효가 시작된다. 시간이 지나면 수박즙의 단맛은 한층 차분해지고, 홍고추의 향과 생강의 알싸함이 어우러져 훨씬 개운한 맛으로 변한다.
주호 스님은 “화채 같지만 풀국이 들어가기 때문에 김치처럼 발효가 된다”며 “발효가 진행되면 단맛보다 개운한 맛이 살아난다”고 설명했다. 흥미로운 점은 붉은 수박 과육을 처음부터 넣지 않는다는 점이다. 잘게 썬 수박의 빨간 과육은 따로 남겨두었다가 먹기 직전에 올린다. 과육까지 함께 발효시키면 쉽게 무르고 색이 흐려질 수 있어서다. 마지막에 올린 빨간 수박 속살은 물김치에 보석을 띄운 듯 화룡점정이 된다.
절집에서는 음식의 모양 역시 수행의 일부로 여긴다. 맛뿐 아니라 보는 사람의 마음까지 편안하게 해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서 재료 크기를 맞추는 일도 중요하다. 수박의 흰 부분, 오이, 배추, 토마토를 비슷한 크기로 썰어야 씹는 식감이 조화를 이루고 국물 맛도 균일하게 배어난다. 주호 스님은 “재료의 크기를 같게 써는 것이 가장 중요한 포인트”라고 말했다.
수박물김치의 또 다른 장점은 속이 편안하다는 점이다. 찬 수박을 먹으면 배가 아프거나 설사를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하지만 발효 과정을 거친 수박물김치는 부담이 훨씬 적다. 주호 스님은 “생수박을 먹으면 배탈이 나는 사람도 김치로 발효시켜 먹으면 여름을 입안 가득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반나절 정도 냉장고에서 숙성시키면 붉은 수박즙과 고춧물이 서서히 어우러진다. 국물은 투명한 분홍빛을 띠고, 그 위에 마지막으로 올린 수박 과육은 보석처럼 반짝인다. 수박 한 통을 다 먹지 못해 고민되는 계절이다. 화채를 만들고도 남았다면 이번에는 물김치에 녹여보는 건 어떨까. 제철의 맛으로 무더위를 달랜 사찰의 지혜가 물김치 한 그릇에서 시원하게 살아난다.
재료 : 수박 1㎏, 오이 1/2개, 알배기 배춧잎 3장, 방울토마토 100g, 홍고추 1개, 생강 10g, 배 1/4개
양념 : 묽은 밀가루죽 3큰술, 소금 2큰술, 맑은 간장 1큰술
1. 수박은 껍질을 벗긴 뒤 과육 100g은 2㎝ 크기의 정육면체로 잘라두고 나머지 과육은 강판에 갈아서 과즙을 짠다.
2. 수박 껍질 흰 부분은 얇게 썰고, 오이는 반으로 갈라 씨를 빼 수박과 같이 작게 썬 다음 모아서 소금 1큰술을 뿌려둔다.
3. 배춧잎을 깨끗이 씻어서 다른 채소와 동일하게 썬다.
4. 방울토마토는 꼭지를 제거한 뒤 4등분으로 잘라 준비한다.
5. 믹서에 홍고추 1개, 생강 10g, 배 1/4개를 넣고 생수 500mL를 부은 후 곱게 갈아서 면보에 걸러 짠다.
6. 준비된 재료에 수박즙과 양념물을 섞고 소금 1큰술, 맑은 간장 1큰술을 넣고 간을 맞춘다.
7. 수박의 빨간 과육은 따로 남겨두었다가 먹기 직전에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