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와 피터의 법칙
“영업할 때야 날아다니셨지. 관리하고 나서는 영 좀 꽝이 잖아요. 동의?”
인사팀장의 말에 백정태 상무의 얼굴이 굳어진다. 인사팀장이 정리해고 대상자로 콕 찝은 사람은 자신이 수족처럼 아꼈던 김낙수 부장. 백 상무는 김 부장의 이름을 적어낼 수 있을까.
‘서울 자가+대기업+부장. 이 셋은 2026년 한국사회에서 중산층을 상징하는 필요조건이다.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는 중산층의 삶, 욕망, 꿈을 잔인할 정도로 투명하게 비춘다.
서울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제공=JTBC
김낙수 부장은 대기업 25년차 부장이다. 서울에 자가 아파트를 마련했고, 아들은 상위권 대학에 보냈다. 대기업 부장을 아무나 하나. 김 부장은 그런 자신이 자랑스럽다.
내년엔 샐러리맨의 꽃이라는 임원 승진을 앞두고 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큰 대과만 없다면 승진 가능성은 99.9%다.
김 부장은 과연 상무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주변 공기는 김 부장 생각만큼 호의적이지 않다. “낙수야. 나도 이왕이면 도진우말고 내 새끼가 상무달았음 싶다. 진심이다. 경거망동하지마. 요새 보는 눈이 많아” 백 상무는 준엄한 경고를 날리지만 눈치없는 김 부장이 제대로 알아 들었을까.
영업1팀을 맡은 김 부장은 누구보다 일찍 출근해 업무를 챙기지만 영업2팀에 실적에서 매번 뒤진다. 상명하복과 권위주의가 몸에 밴 ‘꼰대력’으로는 신세대 팀원들과 융화도 쉽지 않다. 분위기를 쇄신하려 야외 커피타임을 갖고, 브레인스토밍을 해보지만 팀원들은 ‘갑자기?’라며 의아한 표정을 감추지 않는다.
서울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제공=JTBC
지켜보는 백 상무는 답답하다. “왜 이렇게 도진우팀이랑 차이나 나냐. 왜 모든 부분에서 1팀이 2팀에게 지는가 말해봐. 너도 생각을 해봤을것 아냐?” 김 부장은 부원들에 책임을 떠넘긴다. “아시다 시피 요즘 애들을 말을 잘 안들어요. 휴가도 쉽게내고”
승진은 커녕 해고를 걱정해야 할 판. 김 부장은 과연 위기를 넘어설 수 있을까.
영업의 달인과 관리의 달인은 다르다
사실 김 부장은 영업의 달인이었다. 학연 지연을 적절히 이용하는 인맥관리와 사내정치, 사람을 사로잡는 특유의 넉살, 뛰어난 임기응변, 술자리 분위기를 주도하고 골프접대까지 완벽하게 소화하는 접대술 등은 누구도 따라오지 못했다. 그 공으로 본사 팀장까지 됐는데 지금은 왜 그만큼 못할까?
‘피터의 법칙(Peter Principle)’을 주목해볼만 하다. 피터의 법칙이란 조직 내에서 직원들은 자신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단계까지 승진한다는 법칙이다. 캐나다의 교육학자 로렌스 피터(Laurence J. Peter)가 1969년 소개한 이론이다.
승진은 현재 직무를 ‘얼마나 잘하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유능한 직원은 계속 승진을 하다가 본인의 역량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직책에 도달하면 승진이 멈춘다. 이 결과 조직의 임원은 해당업무를 수행하기에 부적합한 사람들로 채워지게 된다. 피터의 법칙은 ‘왜 무능한 상관이 많은가’를 설명해준다.
사원으로 뛰어남 →대리 승진
대리로 뛰어남 → 과장 승진
과장으로 뛰어남 →부장 승진
부장으로는 뛰어나지 않음 →만년 부장. 임원 승진 불가
원채 영업성과가 뛰어났던 김낙수 부장은 승진 누락 한번없이 부장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부장은 관리직이다. 현장직인 영업과 다르다. 사람을 관리하고 조직을 운영하는 능력이 더 필요하다.
홍명보 선수와 홍명보 감독의 차이
“팀장이 뭐야. 하루종일 보고 붙잡고 있는 사람이야. 팀원들 장단점 파악해서 걔들 역량 최대한 발휘할 수 있게 판 깔아주는 사람 아냐!”
마침내 백 상무는 김 부장 면전에서 폭발한다. “너 맨날 담배피는 대리 뭐 잘해? 강점이 뭐야? 똘똘한 얘들 데리고 너, 바보들의 행진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낙수야. 너 부장이다 부장. 대기업 부장. 제발 움직임을 크게 크게 가져라”
피터의 법칙이 시사하는 바는 현재 일을 잘한다고 다음 직급의 일도 잘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종종 스포츠 슈퍼스타가 감독으로 실패하는 것도 이와 비슷하다. 혼자잘해도 되는 운동능력과 팀을 하나로 모으는 인화력, 전술이해도는 다른 영역이다. 아시아의 리베로로 불렸던 홍명보 감독의 2026년 월드컵 실패가 떠오르는 대목이다.
서울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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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피터의 법칙 대로라면 모든 상사는 무능하고, 무능한 상사가 이끄는 조직은 결국 무너질 수 밖에 없을까? 피터의 법칙이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직에 맞는 직무교육의 중요성이다. 과장과 부장, 부장과 실장은 역할이 다른만큼 승진에 따른 직무교육이 충실히 제공되지 않는다면 조직의 효율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가르침을 준다. 만약 관리자가 되기 싫은 사람은 다른 부문으로 인사를 내는 것도 방법이다. 승진인사 때는 단순히 현 성과만 볼 것이 아니라 대상자가 다음 자리에 필요한 역량과 적합성을 갖췄나까지 들여다 봐야 한다.
9회말 2아웃에 나서는 부장의 심정은
백 상무에게 질타를 받은 김 부장은 절치부심, 리더십에 변화를 주려하지만 잘 먹히지 않는다. 마침내 김 부장은 결단을 내린다. 영업 뛸 때처럼 현장으로 뛰어들어 고객과 관계사를 관리해보겠다는거다.
“이런 벼락치기 영업이 정말로 부장님께 도움이 되나요? 아니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고 하시는 걸까요?” 팀원인 정 대리의 말에는 김 부장에 대한 불신이 가득 묻어있다. “9회말 2아웃에는 그냥 머리 비우는 거야. 내가 좋아하는 공하나 오겠지 하고 풀스윙하는 거야. 그게 제일 좋은 방법이야.” 김 부장은 정 대리의 질문에 나직이 답한다.
서울자가에 대기업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
제공=JTBC
사실 가장 답답한 사람은 김 부장 본인이다. 그로서는 몸으로 때우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던거다. 어쩌면 김 부장의 모습은 감당하기 쉽지 않은 자리에서 악전고투를 하고 있을 많은 K 상사들의 자화상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