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3월, 인공지능(AI) 알파고가 감히 최고의 프로기사 이세돌에게 도전했다. 이세돌은 여유로웠다. 기계는 기계적으로 둘 것이고, 이에 자신은 창의적으로 대처할 것이라며 승리를 장담했다. 모두 인간의 완승을 의심치 않았다. 대국이 시작되자 예상대로 AI 실력이 형편없어 보였다. 인간의 눈에는 포석부터 엉성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뜬금없는 수를 두는데도 형세가 만만치 않았다. 어느 순간 해설자들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인공지능이 지구촌 최고수를 소리 없이 베고 있었다. 형체가 없는 인공지능은 잔인했다. ‘두 뼘 천하’ 바둑판에 풍운이 일었다. 그날 이세돌은 자신을 덮치는 거대한 기계음을 들었을 것이다.
챔피언 인간은 속절없이 무너졌다. 돌을 거둔 후에도 프로기사들은 어느 수가 패착인지 찾지 못했다. 패인을 알 수 없는 패배, 바둑 천재들은 열패감에 휩싸였다. 수천년 동안 천하 고수들이 검증한 정석들이, 추호의 의심도 하지 않았던 이론들이 흔들렸다. AI는 인간계에 새로운 정석을 선보이며 바둑계를 접수했다. 프로기사들은 하나둘 AI 앞에 엎드렸다. 인공지능을 떠받들며 이기는 법을 묻고 또 물었다.
인공지능이 휘젓기 전에는 바둑이란 엄연히 예술의 영역에 존재했다. 더 나아가 도(道)라고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래서 고수의 경지는 아득히 높고 먼 곳에 있었다. “깊고 그윽한 그 경지는 어둡고도 밝다. 고수는 ‘암연이일장(闇然而日章)’, 즉 어두워 보이나 나날이 빛나는 군자와 같다. <중용>에 나오는 이 말은 살아있는 기성(棋聖)이라 불리는 오청원 9단의 휘호이기도 하다.”(김태관 <고수>) 반상의 침묵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하면, 또 자신만의 기풍이 없으면 이겨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하지만 AI가 등장한 이후에는 많은 게 달라졌다. 신화와 전설은 퇴색했고, 바둑은 예술이 아닌 마인드스포츠로 분류되었다.
2026년 7월, 이번에는 인간이 감히 최고 반열의 인공지능 카타고에 도전했다. 바둑 챔피언 신진서 9단이 절대 강자인 AI를 불러냈다. 다수가 10년 전과는 반대로 인간이 질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신진서가 이겼다. 한 판을 내줬지만 내리 두 판을 이겼다. 비록 2점을 깔고 두는 불평등 대국이지만 그 승리에는 많은 것이 들어있었다. 관전기자도 감격했다. “이세돌 9단이 알파고를 상대로 거둔 1승이 인공지능도 절대 무결한 존재가 아님을 보여줬다면, 10년 후 신진서 9단이 카타고를 상대로 올린 2승은 인간의 자유의지가 AI의 완벽함을 공략할 수 있음을 입증했다.”(경향신문, 윤은용)
10년 전에는 AI가 인간의 바둑을 학습하여 인간의 영역을 공략했다면, 이제는 인간이 AI의 바둑을 배워서 인공지능의 세계를 넘보기 시작했다. 인간에게 유리한 불평등 게임이었기에 ‘기획된 승리’라는 평도 있지만, 인간의 실력이 AI와의 격차를 줄였음은 분명해 보인다.
그렇다면 빛의 속도로 달려가는 AI를 인간이 어떻게 추격할 수 있었는가. 또 AI의 완벽함을 공략할 인간의 무기는 무엇일까. 인간의 상상력이 아니면 이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신진서는 AI와 겨루며 그 속에 인간의 정신이 스며들 공간을 발견했을 것이다. 관전자들은 알 수 없지만 인류를 대표하는 고수이기에 느낌이 왔을 것이다.
신진서는 귀한 말을 들려줬다. “인간만이 가진 고유의 기풍이 존재한다는 걸 보여드렸다고 생각한다.” 이세돌도 거들었다. “(신진서는) 모방을 넘어선 자신만의 뭔가를 만들어가고 있다.”
그럼 평등한 조건하에서도 인간의 바둑이 인공지능을 이길 수 있을까. 당장은 쉽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머잖아 인공지능을 넘어서는 영웅이 나타날 것이다. 미래학자들의 예언대로 소유보다 접속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 도래하면 인공지능과 공존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는 신인류가 등장할 것이다. 그들의 상상력이 새로운 세계를 열 것이다. 범용인공지능(AGI) 시대에는 인공지능 활용에 최적화된 뇌구조를 지닌 신인류가 등장할 것이다. 어쩌면 이미 태어나 지구촌 어디에서 자라고 있을지도 모른다.
인공지능이 속속 제 몸을 갖고 인간 앞에 나타나고 있다. 그럼에도 인간의 교양과 예술은 저들의 완벽함 위에 존재할 것이다. 지식보다는 지혜가, 속도보다는 방향이 우리를 지켜줄 것이다. 우리에게는 신진서의 승전보가 있다.
김택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