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일담부터 말하자면, 6월 어느 날 남편이 데이미언 허스트의 전시를 보는 동안 나는 미술관 카페에 앉아 데이비드 호크니의 책을 읽었다. 나만의 의미가 담긴 미학적 저항으로 끝까지 허스트를 밀어낸 날, 왜 하필 나는 호크니를 선택했을까?
손수 제작했느냐 아니냐를 두고 그 두 작가가 격돌한 때가 있었지만, 책을 읽으면서 나는 호크니가 지키려 한 것이 손의 순수성보다 눈의 능동성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그에게 직접 그린다는 것은 화가의 천재성을 증명하는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의 얼굴을 오래 바라보고, 같은 길을 계절마다 걸으며, 나무 한 그루가 어제와 오늘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자신의 몸으로 확인하는 일이었다.
허스트와 달리 호크니는 자신을 한 번도 대표작 속에 가두지 않았다. 수영장 회화로 성공한 뒤에도 사진 콜라주를 만들고 무대미술을 거쳐 풍경으로 돌아왔으며, 여든이 넘어서도 아이패드로 봄이 도착하는 시간을 그렸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에게는 정교한 구조와 공간의 침묵을, 베이컨에게는 추상 시대에 인물 구상화로 맞서는 배짱을, 피카소에게는 양식을 바꿀 자유를 배웠다. 세잔에게서는 카메라의 외눈과 달리 움직이는 두 눈을, 반 고흐에게서는 자연을 능동적으로 바라보는 열정을, 모네에게서는 변화하는 계절을 연작으로 기록하는 삶을 배웠던 호크니. 그러나 누구의 눈에도 머물지 않았다. 거장의 시선을 빌릴 때마다 자신의 몸과 기억, 당대의 새로운 도구를 보태 더 멀리 나아갔다.
카메라는 한 지점에서 한순간을 붙잡지만 인간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우리는 움직이고 되돌아보며, 방금 본 것을 이전의 기억과 겹쳐 본다. 호크니는 사진보다 정확하게 세계를 복제하려 하지 않았다. 피카소와 세잔의 다중시점을 사진 콜라주로, 모네의 연작을 비디오와 아이패드의 흐르는 시간으로 확장하면서 회화를 인간의 시각을 탐구하는 가장 현대적인 장치로 갱신했다는 점이 놀랍다.
그날 여러 전시를 본 뒤 남편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을 물었다. 그는 허스트의 유리 상자 안, 잘린 소머리 주변을 날아다니던 파리 떼를 꼽았다. 정말 역겨웠고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그러나 잊히지 않는다는 것이 과연 예술의 가장 높은 가치일까. 충격이 기억을 점령하는 것과 하나의 그림이 오랜 시간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내는 것은 같은 일일까? 호크니의 그림은 파리 떼처럼 기억 속으로 달려들지 않는다. 부모가 나란히 앉아 있는 방, 친구 부부 사이의 빈 공간, 계절에 따라 색을 바꾸는 나무. 서로 다른 시간에 관찰한 인물과 사물, 움직이는 두 눈의 시점과 화가의 기억이 포개져 있어 한 번에 다 읽히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기억의 창고에 들어갔다가 시간이 흐른 뒤 일부러 다시 꺼내 보게 된다. 그때마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던 시선과 거리, 시간과 관계가 모습을 드러낸다.
호크니가 죽는 순간까지 늙지 않았던 것은 자신의 이미지를 더 강하게 만드는 대신, 거장들이 건네준 새롭게 발견하는 인간의 눈에 동시대의 감각과 기술을 더해 회화가 아직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새롭게 물었기 때문일 것이다. 하여 천국에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을 호크니에게 이 글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