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일 일본 도쿄의 한 환율 전광판 앞을 시민들이 지나고 있다. 도쿄|EPA연합뉴스
40년 만에 최저 수준으로 떨어진 엔화 가치를 떠받치기 위해 미국이 ‘구원투수’로 나선 것을 두고 선거를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행정부가 자국 경제에 미칠 악영향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안팎에서 나온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마이니치신문 등 일본 언론과 미국 일간 월스트리트저널(WSJ)은 4일 미국이 일본과 함께 엔화 매수에 나서게 된 이면에는 “우정”(트럼프 대통령)이 아닌 미국의 현실이 있다고 일제히 보도했다.
전날 미국과 일본은 지난달 31일 공동으로 엔화 매수에 개입했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일의 외환시장 공조 개입은 2011년 동일본대지진 이후 15년 만이다. 매수 개입으로 한정하면 1998년 아시아 금융위기가 마지막 사례일 만큼 이례적이다. 일본 당국은 지난달 30일과 31일 이틀 동안 총 13조7800억엔(약 125조원)을 투입해 엔화 방어에 나선 것으로 추정된다. 블룸버그통신은 일본은행(BOJ) 계좌 분석을 토대로 30일 하루에만 8조4500억엔이 투입됐으며, 사실로 확인될 경우 일본 역사상 최대 규모의 일일 외환시장 개입이라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번 개입이 “일본에 대한 우정의 신호”라며 “일본은 약간의 도움이 필요했고 우리는 언제나 일본을 위해 그 자리에 있다”고 말했다. 동맹인 일본을 돕기 위해 미국이 나섰다는 취지다.
닛케이는 “일본이 미 국채를 대량 매도해 미국 장기금리가 상승하는 상황만큼은 반드시 피하고 싶었던 미국의 현실적인 이해관계가 있었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대부분 미 국채로 이뤄진 외환보유액을 처분해 엔화 방어에 나설 경우 미 국채 가격 하락과 금리 상승을 피할 수 없다. 이 금리 상승은 국채 이자 증가와 미 주택담보대출 금리 상승, 소비 위축 등으로 이어져 11월 중간선거에서 여당에 불리해질 수 있다.
‘일본 엔화 50~100억달러 매수’라는 스콧 베선트 미국 재무장관의 메모가 지난달 31일(현지시간) 메릴랜드주 캠프데이비드에서 열린 각료회의에서 찍힌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엔화 약세·달러 강세가 미국 무역적자를 확대할 수 있다는 점도 미국의 우려 중 하나다. 마이니치는 “미국의 미·일 동맹 중시도 하나의 이유지만 엔화 약세가 계속되면 일본 기업의 미국 수출 경쟁력이 높아져 트럼프 행정부가 추진해 온 ‘트럼프 관세’ 효과가 사실상 상쇄될 수 있다는 점도 우려한 것으로 보인다”고 짚었다.
미국이 FIMA 레포를 활용한 것에서도 이런 속내를 읽을 수 있다. FIMA 레포는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외국중앙은행이 보유 중인 미 국채를 환매조건부로 매입해 달러화를 공급하는 제도다. 일본이 미 국채를 팔지 않고 판 것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있는 것이다.
WSJ는 “일본의 통화 약세는 도쿄뿐 아니라 워싱턴에도 문제였다”면서 미국의 이례적인 외환 시장 개입이 일본의 대미투자를 지원하는 등 미국 경제 부양에 목적이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엔화 가치를 끌어내리는 기초 여건이 그대로인 이상 한계가 뚜렷하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가 여전한 데다 다카이치 사나에 정부가 돈을 풀어 경기 부양을 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WSJ는 “중앙은행의 통화정책이나 정부의 재정정책 변화가 뒷받침되지 않은 외환시장 개입은 몇 주 정도 효과를 내다 결국 힘을 잃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미국이 일명 ‘사나에노믹스’라 불리는 경기부양책에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마이니치는 “엔화 약세의 근본 원인에는 다카이치 정권의 경기 부양 중심 경제 정책이 있다는 점에서 미국이 일본에 정책 수정을 요구하는 것은 피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