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의 여름방학 일과는 아침에 <탐구생활> 방송을 듣는 데서 시작했다. 학년별로 정해진 시간대에 EBS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고 학교에서 지급된 교재를 푸는 방식이었다. 물론 서울올림픽 시대에 그런 예스러운 기획이 잘 통하진 않았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 방송분을 놓친 어린이들을 위한 대본이 개학 즈음해 공공연히 유통됐고, 어느 문방구에서는 아예 모범 답안을 만들어 판다더라는 소문도 돌았다. 난 얕은 개울에 들어갈 때도 준비운동을 잊지 않던 교과서적인 꼬마였던지라 편법 없이 정시에 라디오를 켜고 교재를 펼쳤다.
그날 치의 방송 교습을 마치면 동네 책 대여점으로 달려갔다. 어린이 월간지 <보물섬>이나 만화책 <맹꽁이서당>을 빌릴 때도 있었지만 ‘지경사’라는 아동문학 출판사의 소녀 명랑 소설 시리즈를 특히 좋아했다. <말괄량이 쌍동이>와 <외동딸 엘리자베스> 등 영국 기숙학교를 배경으로 한 아기자기한 우정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책을 빌린 후 동전이 남으면 슈퍼마켓에 들러 바나나킥이나 홈런볼 과자를 샀다. 이따금 큰맘 먹고 지하철역 노점까지 걸어가 설탕 한 움큼 넣고 찐 옥수수나 갓 썰어낸 당면순대를 사기도 했다. 책 한 권과 군것질 하나로 오후 내내 즐거웠다.
이웃에 나와 동갑내기의 여자아이 셋이 더 있었다. 그해 여름 우리 넷은 모이기만 하면 우리가 개발한 ‘중전 놀이’라는 걸 했다. 놀이의 개요는 MBC에서 방영한 <조선왕조 오백년> ‘인현왕후 편’이었다. 궁중 당의를 흉내 내어 손을 앞치마 뒤로 감추고 저마다 인현왕후와 희빈 장씨, 숙빈 최씨가 되었다. 그날의 가위바위보에서 진 사람이 상감마마 남장을 했다. 안방엔 중전이, 작은방엔 희빈이, 다용도실 빨래통 옆엔 숙빈이 각각 들어가 앉았다. 극 전개상 인현왕후의 폐위 및 복위 시점엔 우리도 안방과 작은방 사이에서 위치 바꾸기를 했다. 후궁 품계의 ‘숙원’을 ‘수건’으로 알 만큼 무지했으면서도 권력의 속성을 모르지는 않았던 게다. 우리 중 하나에게 언니들의 놀이판에 끼고 싶어 안달하던 두 살 터울의 여동생이 있어, 궁녀 역할은 그 아이가 도맡아 했다. 마마님은 셋인데 궁녀는 하나라, 인현왕후 시중들다 어느새 장희빈의 명을 받들어 승은 상궁을 끌어내고 막판엔 장희빈의 입에 사약(콜라)을 부어 넣기도 했으니, 배신의 달인이었던 셈이다.
어느 날엔가 거실 책장에서 <왕비열전>이란 제목을 가진 전집을 발견했다. 세로쓰기 방식으로 제작된 옛 책이었다. 궁중 서사에 몰입해 있던 우리는 그걸 읽고 놀이의 레퍼토리를 확장해보려는 야심을 품었다. 목차는 한자였지만 본문은 한글로 쓰여 있어 페이지를 휙휙 넘기며 ‘장희빈’ ‘숙종’ 이런 단어가 어디 나오나 찾으려 했다. 그러던 중 기묘한 묘사에 닿게 되었으니, 그 책은 우리가 막연히 예상했던 성격의 어른용 위인전기가 아니었다. ‘방중술’ 같은 생경한 낱말이 나왔으나 학교 가서 선생님께 의미를 여쭈면 안 됨을 직감했다. 누렇게 바랜 종이에 적힌, 임금의 밤을 기쁘게 하기 위한 기술들. 생애 처음 마주한 ‘이세계’였다.
싱그러운 계절이라 하기엔 몹시 덥지만, 아무튼 여름이다. 오늘 몫의 일을 하고서 영화 <호프>를 보러 가는 이 밤, 탐구생활 과제를 끝낸 다음 책 대여점으로 뛰어가고 친구네 집에 모여서 중전 놀이하던 그해 여름방학처럼 마음이 둥실거린다.
이소영 제주대 사회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