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은 여름인가 보다 하고 넘기기에는 더워도 너무 덥다. 지난 7월31일 경남 양산 낮 기온이 41.4도까지 오르며 근대 기상 관측 이래 국내 최고기온을 새로 썼다는데, 이후로도 기록은 연일 깨지고 있다. 특정 지역만의 일이 아니다. 뙤약볕이 내리쬐는 한낮에는 잠깐 걷는 일도 버겁고, 밤에도 열기가 식지 않아 곳곳에서 열대야가 이어진다.
푹푹 찌는 날들 가운데서도 ‘살 것 같다’는 소리가 절로 나온 순간이 있었다. 은행 볼일을 보러 갔을 때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온몸을 감싸는 서늘한 공기라니. 평소라면 지루했을 번호표 대기 시간이 그날만큼은 종일이라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침 출입문이 다시 열리고 어르신 한 분이 들어섰다. 안내 직원이 “어떤 업무를 도와드릴까요?” 하고 묻자 그가 숨을 고르며 말했다. “아이고, 너무 더워서…” 그제야 은행 출입문에 붙은 ‘무더위쉼터’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무더위쉼터는 주민센터, 복지관, 경로당 등의 공공시설에서 출발했지만 최근 은행과 편의점 등 민간시설까지 참여하며 생활권 곳곳으로 넓어지고 있다. 골목 어귀의 익숙한 공간이 요긴한 피난처가 된다는 것은 무척 반가운 움직임이다.
그런데 우리 동네 무더위쉼터를 찾아보다가 김이 팍 샜다. 포털 지도에 나타난 곳의 대부분은 여전히 경로당이었다. 재난안전 앱 ‘안전디딤돌’까지 내려받았지만 검색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았다. 은행에서 표지판을 보지 않았다면 그곳이 쉼터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편의점도 운영된다는데 어느 지점인지 금세 알아내기 어려웠다.
알고 보니 이름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서울시의 경우 민간과 협력해 운영하는 시설에 ‘기후동행쉼터’라는 이름을 붙인다. 내가 찾던 정보는 서울시 재난안전정보 포털 ‘서울안전누리’의 별도 항목에 모여 있었다. 운영 주체에 따라 명칭과 관리 체계를 나눌 필요는 있겠지만, 당장 쉴 곳을 찾는 시민에게 그 구분을 헤아리고 여러 앱과 누리집을 오가며 검색하라는 것은 되레 불쾌지수를 높이는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
많은 지방자치단체가 무더위쉼터 운영을 알리지만, 대개 먼저 내세우는 건 ‘몇 개소’라는 숫자다. 중요한 것은 지도에 표시된 공간이 누구에게나 실제로 열려 있느냐다. 회원 중심으로 운영되는 경로당은 낯선 사람이 선뜻 들어가기 어렵고, 열대야를 피하도록 야간까지 문을 여는 곳은 많지 않다.
민간시설의 사정도 헤아려야 한다. 은행과 편의점은 본래 업무만으로도 분주한 영업장이다. 쉼터 이용 안내와 자리 관리까지 더해지면 현장의 부담도 커질 수 있다. 민간의 선의에만 기대지 않고, 참여가 지속되도록 뒷받침할 방안도 고민해야 한다.
지난달 열린 청소년 기업가정신 축제 ‘아산 유스프러너 데모데이’에는 프로젝트의 시행착오와 배움을 돌아보는 ‘실패박물관’이 마련됐다. 그곳에 폭염 속 배달 라이더를 위한 아이디어 하나가 소개됐다. 인천아라고 학생들은 라이더들이 물을 마시거나 잠시 쉴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줄 가게를 지도에 표시하는 앱을 구상했다. 가게의 ‘호의’만으로는 지속되기 어렵다고 보고, 지자체·기업이 참여하는 인증제를 통해 가게에도 이익이 돌아가는 구조까지 고민했다.
구상한 대로 앱을 완성하지 못해 실패 사례로 소개됐지만, 학생들의 문제의식은 분명했다. 새 공간을 만들기보다 자리를 내어줄 가게를 찾아 이용자와 연결하고, 그 호의가 지속될 조건까지 함께 고민한 것이다.
쉴 곳이 있어도 찾는 사람이 그 존재를 알지 못하면 그곳에 닿을 수 없다. 누군가 기꺼이 문을 열어두었더라도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으면 이용자는 문 앞에서 망설인다. 좋은 뜻으로 시작한 제도라도 운영하는 사람의 부담에만 기대면 오래가기 어렵다. 무더위쉼터 정책도 같은 질문 앞에 있다.
문을 열어주는 일은 환대의 시작이다. 열려 있다는 사실만으로 환대가 완성되는 건 아니다. 쉼터가 어디에 있는지 알리고, 찾는 사람이 헤매지 않고 닿을 수 있게 하며, 문을 열어둔 곳의 수고까지 지탱하는 일도 정책 몫이어야 한다. 무더위쉼터가 숫자를 넘어 제 역할을 하는 사회안전망으로 자리 잡는다면, 폭염이 일상이 된 시대에도 틈틈이 숨을 고르며 여름을 날 수 있지 않을까.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
<서진영 <로컬 씨, 어디에 사세요?>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