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안의 화제가 됐던 드라마 <김부장>의 흥행 비결은 시원한 액션이다. 북파 공작조로 일했던 김부장(소지섭)이 납치된 딸을 구하기 위해 봉인됐던 ‘과거’를 풀고, 악당을 직접 단죄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빠져들었다. 매회 몰아친 액션은 그야말로 만화에나 나올 법하다. 이를테면, 2회 과거 회상 장면에선 김부장 혼자서 총격전을 벌인 뒤 북한 대남 첩보총국장을 자신의 차에 태운 채 다리 위에서 강으로 추락한다. 이 장면은 아무리 ‘인간 병기’ 김부장이라 하더라도 비현실적이다.
정작 소지섭은 이 장면을 찍은 적이 없다고 한다. 이 장면은 전부 인공지능(AI)으로 만들어졌다. 제작사가 이 사실을 알려주기 전까지 시청자들은 알아채지 못했다.
드라마는 결말도, 시청률도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그러나 우리가 맞닥뜨릴 이야기는 서늘하다. 극중 액션 수위가 높아서 주연 배우가 대역 없이 연기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우리 눈을 속인 AI가 마냥 감탄스럽진 않다. 여태까지 고난도 액션은 주로 스턴트 배우가 대역을 하곤 했는데, 이번엔 그 자리를 보조 수단에 그치던 AI가 꿰찬 것이다. <김부장>이 방영한 액션 장면이 놀라운 건 AI가 국내 드라마 제작 과정에서 인간 배우 영역을 침범한 첫 번째 시도라는 점 때문이다. 인간 배우 시장을 넘보는 AI는 할리우드까지 흔들고 있다.
‘피지컬AI’는 온갖 기술 연마 중
AI 훈련엔 고도화된 데이터 필요
인간을 착취하는 ‘추출 기계’ AI
할 일은 인간 노동을 재정의하는 것
진화를 거듭하며 똑똑해진 AI는 이제 ‘몸’까지 얻었다. ‘피지컬AI’라며 우리를 도울 ‘휴머노이드’ 로봇들이 온갖 기술을 연마 중이다. 챗GPT 같은 기존의 생성형 AI가 디지털 데이터로 학습했다면, 피지컬AI는 인간의 동작과 감각을 반복 학습한다. 인간에게 쉬운 일이 AI에는 어려운 일일 수 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체화된 경험 지식, ‘암묵지(暗默知, tacit knowledge)’라 부른다. 이는 AI에 인간의 우위를 확인시켜주는 논리였다. 그러나 냉장고를 옮기고, 집안일까지 척척 해내는 로봇을 보면, AI가 배울 수 없는 인간의 능력이 과연 있을까 싶다.
AI가 인간을 닮아가는 훈련엔 고도화된 데이터가 필요하다. 질문을 하면 바로 답해주는 AI 서비스는 필요한 자료를 가공·검수하는 ‘데이터 라벨링’ 노동자들이 있어야 한다. 이들이 AI가 학습해서는 안 될 유해 콘텐츠를 먼저 걸러내고, 훈련에 필요한 영상 데이터를 수작업으로 분류한다. AI가 알아서 웹상의 데이터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다. 로봇 역시 인간처럼 작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행동을 하나하나 학습해야 한다. 사람의 몸에 카메라와 센서를 달아 일상을 수집하는 ‘데이터 노동’이 그것이다. 지난 6월 영국 가디언은 인도의 데이터 수집 기업이 한 공장에서 노동자들의 머리에 장착형 카메라를 착용하게 한 뒤 작업 영상을 수집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부업으로 머리에 스마트폰을 달고 집안일을 하는 주부들도 있다. 사람에게는 자연스러운 손동작과 감각은 학습하거나 복제하기 어렵다. 이 때문에 1인칭 시점으로 기록해 로봇이 배울 교과서를 만드는 것이다. 데이터 수집은 주로 인건비가 저렴한 인도·중국 등 저개발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다. 한국 정부도 제조업 명장들의 숙련된 노동을 데이터베이스로 구축하는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노동자가 자기 손으로 자신의 일자리를 대체할 로봇을 가르치는 셈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인터넷연구소의 세 학자는 <AI는 인간을 먹고 자란다>란 책에서 AI를 인간을 착취해서 유지하는 ‘추출 기계’로 규정한다. 이들의 지적대로 우리는 AI의 전지전능한 모습에 적응하느라 이 사실을 간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AI가 학습한 데이터가 노동의 결과라면, 당연히 보상과 권리가 뒤따라야 한다. AI를 완전하게 만드는 일이 정작 인간을 배제시키도록 해선 안 된다. 이미 케냐의 아프리카 콘텐츠 검수원 노조(ACMU) 결성 등 노동자들 스스로 변화의 계기를 만들고 있다.
컴퓨터가 출현한 이래 우리는 기술이 인간의 노동을 대체해가는 과정을 목격해왔다. 지금은 로봇이 일을 하는 단계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서 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인간의 노동을 재정의하는 것이다.
이명희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