긋는다 존재의 시작, 한 획… 담는다 내 삶을, 정신을

유인화 선임기자

학고재갤러리 ‘한획전’

‘태곳적엔 법이 없었다. 순박이 깨지지 않았다. 순박이 깨지자 법이 생겼다. 법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한 획에서 나왔다. 한 획이란 존재의 샘이요, 모습의 뿌리다(太古無法, 太朴不散, 太朴一散, 而法立矣, 法於何立, 立於一劃, 一劃者, 衆有之本, 萬象之根).’(석도의 ‘일획론’ 중)

한학을 공부한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55)는 중국 청나라 초창기 화가인 석도(石濤·1641~1720)의 ‘고과화상화어록’ 중 ‘일획론’을 읽으며 무릎을 쳤다. ‘존재의 뿌리가 하나의 선에서 시작된다’는 한 획의 철학에서 착안, ‘한획전’을 기획했다. 전시는 7월6일부터 8월21일까지 서울 삼청로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한 획은 그림의 시작이고 그 의미는 그림의 주제가 된다. 한 획 한 획 수행을 상징하는 선을 통해 중량감과 부피감을 주는 국내외 작가 15명의 작품 38점이 나왔다. 해외작가는 리처드 세라·안토니 곰리·류샤오동·아니쉬 카푸어·주세페 페노네·샘 프란싯·시몬 한타이 등 7명, 국내작가는 이우환·정상화·김태호·정현·김호득·서용선·윤향란·유현경 등 8명이다.

리처드 세라 <Handke>(191 X 193㎝, 1993년)

리처드 세라 (191 X 193㎝, 1993년)

우찬규 대표는 “이번에 전시되는 작품들은 작가들의 그날그날의 사색을 기록한 감성의 메모이고 본인의 실력을 시험하는 연습장이기도 하다. 추사 김정희는 가슴 속에 만권의 책이 있어야 그것이 흘러 넘쳐 진정한 그림과 글씨가 된다고 했다. 손 끝의 잔재주가 아니고 정신의 품격으로 그림을 그리고 글씨를 써야 그 속에 작가의 정신이 올곧게 깃든다고 한다”고 전했다. 그림은 마음을 갈고 닦는 수련이며 존재에 대한 통찰이기에 관람객들은 그들의 작품 속에 담긴 획들을 보며 걸어온 시간들을 음미하고 박제된 시간들을 떠올려 생명을 불어넣는다.

한획전 전시공간을 들어서면 리처드 세라(72)의 작품이 한눈에 들어온다. 벽을 가득 채운 그림은 상하로 이등분되고, 무게감을 주는 밑부분은 검은색 오일페인트스틱을 녹여 정중동의 의식세계를 보여준다.

정현(55)의 철 드로잉 세 점은 독특한 경험의 소산물이다. 하얀 색칠을 한 철판에 무게감을 주기 위해 흙을 담은 후 자신의 승용차 뒤에 매달고 2시간 동안 달리면 길위의 자갈과 시멘트 표면, 못이나 거친 쓰레기 등으로 인해 자국들이 생기고, 그 상태로 6개월 두면 긁힌 자국에 녹이 형성된다. 녹이 전하는 세월의 흔적은 많은 혼란과 고단함을 함유한 시대의 정신이기도 하다.

김태호(58)의 드로잉은 이성적 논리보다 직감에 호소하는 작품이다. 그는 붓으로 그리지 않고 자연을 이용해 그린다. 나뭇가지를 모아 붓 대신 사용하거나, 먹을 묻힌 나뭇가지 자체를 화폭에 문지른다. 바람부는 날의 작업은 더욱 야생적이다. 나무 자체에 먹을 뿌린 후 종이를 대어 순간의 감각을 기록한다.

정현 <무제>(116 X 116㎝, 2006~2008년)

정현 <무제>(116 X 116㎝, 2006~2008년)

25년째 프랑스에서 활동 중인 윤향란(51)의 ‘산책’ 시리즈는 아이를 키우느라 자신의 작업을 놓치고 있는 경험을 바탕으로 한다. A4용지 크기의 한지에 녹색과 파란색 파스텔로 자신의 하루를 한 획으로 표현한 드로잉은 작가의 지친 삶이 담긴 일기장인데, 그림그리는 작가의 옆에서 엄마처럼 똑같이 본능적으로 획을 긋는 아이가 엄마작가의 스승이었던 셈이다.

유현경(26)은 서울 합정동 모텔에서 아마추어 남성모델의 모습을 담은 작품 ‘일반인 남성 모델 K 서울 마포구 합정동’을 선보인다. 2008년부터 여성화가와 남성모델의 여행 프로젝트를 추진해온 작가는 남성화가와 여성모델에 대한 기존 작업형태를 해체하기 위해 그동안 5명의 아마추어 남성모델과 여행 프로젝트를 해왔다.

헝가리 출신의 프랑스 작가 시몬 한타이(1922~2008)의 ‘Tabula’는 캔버스를 접거나 꾸긴 후 물감을 묻힌 다음에 펴는 작업으로 유명하다. 8세에 급성 전염병인 디프테리아에 걸려 일시적으로 눈이 멀었던 작가는 그리기보다 접는 방법의 페인팅 테크닉을 개발했다. 접힌 부분에 묻은 물감과 묻지 않은 물감 부분의 차이는 예정되지 않은 물질성을 통한 순수한 재미를 준다. 의외의 방법으로 한 획 이상의 한 획의 정신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02)720-1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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