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보름에 떠오른 ‘색다른 달’ 黑磁… 도예가 김시영 ‘검은 달항아리와 그 후’전

도재기 선임기자

조선후기까지 쓰던 전통 자기 가평에 가마 짓고 30년 외길

불에 따라 색상 무늬 무궁무진… ‘검은 대지에 피어난 꽃’ 찬사

수천년 전부터 이 땅에서는 흙으로 모양을 내 불에 구운 각종 용기들이 만들어졌다. 유약 없이 1000도 이하에서 구운 선사시대의 그릇인 ‘토기’, 유약을 입혀 1100도 내외에서 구워 토기보다 단단하고 물 흡수율도 떨어뜨린 ‘도기’, 기술이 응용된 가마와 장인의 손길이 어우러져 1200도 이상에서 태토가 아예 유리질화된 ‘자기’로 발전했다. 고려시대에는 자기 원조인 중국도 감탄한 비취색 청자, 상감기법을 도입한 세계 유일의 상감청자가 태어났다. 의례·생활 용품을 넘어 고유의 미적 감각을 자랑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다양한 종류의 백자와 분청 등으로 발전, 널리 사용됐다.

흙과 불, 도공의 땀으로 빚어지는 도자기는 대개 청자와 백자, 분청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검은색 도자기인 흑자도 이 땅에 있었다. 흑유자·석간주·오자로도 불린 흑자의 시작은 통일신라 말 또는 고려 초로 아직 학설이 엇갈린다. 다만 조선후기까지 사용되다 맥이 끊긴 것으로 추정된다. 전남 영암, 경기 가평 등 전국 곳곳의 청자·백자 가마터에서는 간혹 흑자편들이 발굴된다. 하지만 수량이 적고 완전한 형태가 아주 드물어 흑자는 도자사 연구에서 소외됐다. 도자사가인 장남원 이화여대 교수는 “흑자는 고려를 거쳐 조선후기 실생활 용기로 전성기를 누렸으나 발전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며 “흑자 연구는 아직 미진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현대 도예에서도 청자·백자 작가는 엄청 많지만 흑자를 빚는 작가는 귀하다.

흑자 도예가인 김시영 가평요 대표가 전시작품 사이에서 미소짓고 있다. | 롯데갤러리 제공

흑자 도예가인 김시영 가평요 대표가 전시작품 사이에서 미소짓고 있다. | 롯데갤러리 제공

그런 점에서 도예가 김시영(56)은 독보적이다. 연세대 금속공학과 재학 시절 산악부원으로 태백산맥을 종주하다가 화전민 터에서 흑자 조각을 우연히 만나 흑자에 관심을 가진 이후 30여년 인연을 맺고 있다.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도자기 시험연구소 등을 거치며 흑자 연구를 계속했다. 결국 1989년 흑자 산지이자 고향인 가평에 ‘가평요’를 열고 지금까지 흑자 작업을 한다.

“흑자는 1300도 이상의 고온에서 빚어지는 데다 불에 아주 민감해 흑자 작업을 꺼린다. 하지만 불 조절, 굽는 방식 등에 따라 청자, 백자와 달리 검정을 바탕으로 한 도자 표면의 색상 변화가 무궁무진하다. 요변(가마 안의 불의 성질 등에 따라 도자기가 예기치 않은 색상·무늬 등을 나타내는 것)하는 것이다.” 그는 요변에 따른 특유의 고급스러움과 아름다움 때문에 흑자 외길을 포기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사실 일본, 중국에서는 흑자의 명맥이 이어지고 현대 도예에서도 주목받는다.

그의 작품이 더 의미를 갖는 것은 전통 흑자의 멋과 맛을 현대적으로 계승한다는 점 때문이다. 질박하면서도 깊고 중후한 맛에 더해 오색의 색상, 물방울 같은 다양한 무늬들, 세련된 디자인이 돋보인다. 흑자 재현에 성공한 1997년 그의 흑자를 접한 정양모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검은 대지에 잔잔히 피어난 꽃들과 같다”고 표현하기도 했다.

김시영의 ‘요변천목다완’(부분)

김시영의 ‘요변천목다완’(부분)

김시영은 전문 연구가답게 과학적 성과도 올렸다. 높은 온도 때문에 기도 점막이 모두 말라 생사를 오갈 정도의 고된 작업 끝에 흑자의 특성인 요변의 법칙을 발견한 것이다. “태토, 유약, 불의 온도 등 수많은 실험 데이터가 자료화돼 이젠 요변의 예측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적어도 흑자 작업에서 그는 불의 연금술사가 된 셈이다.

김시영의 흑자 작품은 ‘흑유명가, 가평요-검은 달항아리와 그 이후’(17일까지 서울 소공동 롯데갤러리 본점)에서 만날 수 있다. 백자 달항아리와는 맛이 전혀 다른 흑자 달항아리, 색상과 무늬가 독특한 다완과 차도구, 각종 생활자기 등 40여점이 나와 있다.

전시에는 함께 도예가의 길을 걷는 두 딸 자인(28·이화여대 조소과 졸업), 경인(24·서울대 조소과 재학)씨의 현대 도예 30여점도 출품됐다. 흑자의 전통과 현대적 계승, 발전을 한자리에서 만끽할 수 있다. 김시영 작가는 “흑자가 관심이 높아져 더 대중화되고 연구도 활성화됐으면 좋겠다”며 “현대 도예에서도 다양한 발전이 가능한 분야”라고 강조했다. (02)726-4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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