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행동예술Ⅱ: 의제의 다원화

김준기 | 미술평론가

충돌과 갈등의 현장서 치열한 자기실천

행동가는 의제 현장에서 충돌과 갈등을 통하여 새로운 사회적 합의를 만들어낸다. 행동가는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고 쟁점화할 뿐만 아니라 사회적 갈등의 현장에 참여하고 개입하여 그것을 사회적 공론장으로 이끈다. 근대적 의미의 예술가는 의제 현장을 성찰하고 그것에 대해 비판적 태도로 발언하는 존재다. 따라서 예술가는 스스로 의제를 설정하기보다는 발생한 사건이나 존재하는 의제에 후행하는 창작으로 예술적 실천을 갈음해왔다.

행동예술은 행동가와 예술가의 이분법을 넘어선다. 행동예술가는 의제 설정과 쟁점화, 참여와 개입의 과정에서 예술적 공론장을 주도한다. 이원재와 ‘컬처럴액션’, 전미영과 ‘파견미술’, 박경주와 ‘샐러드’, 박은선과 ‘리슨투더시티’. 이 걸출한 네 명의 액티비스트, 그들이 동료들과 함께 일군 그룹은 한국 사회의 다양한 의제 현장에서 치열하고 지속적인 활동으로 행동예술의 지평을 열었다.

‘컬처럴액션’의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공동행동 공연 장면.

‘컬처럴액션’의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공동행동 공연 장면.

■ 컬처럴액션
예술운동을 사회운동과 연결

2000년대에 들면서 한국의 예술운동은 새로운 방식의 시민운동이 등장, 한 단계 진일보했다. 문화개혁을 위한 시민연대(문화연대)는 예술운동의 패러다임 전환에 큰 역할을 했다. 문화연대는 조직 구성원의 이해와 요구를 수렴하는 이익단체로서의 예술인단체가 아니라 문화와 예술을 다루는 시민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이들은 문화 영역의 의제들을 사회와 정치·경제 영역과 연관시켜 쟁점화하고, 그것을 담론화하며, 이론과 과학의 영역으로까지 이어내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왔다. 긴급 현안에 대한 대응과 더불어 문화다양성이나 표현의 자유 등과 같은 문화적 의제들에 대한 캠페인 활동도 펼쳤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담론과 실천은 2000년대 이후 한국의 행동예술을 갈무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컬처럴액션(Cultural Action)’은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급진적인 문화행동을 통하여 예술운동을 사회운동과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이원재를 비롯해 최준영, 신유아, 손수연 등 문화연대 활동가들은 동시대의 행동예술을 견인한 주역들이다. 이들은 2000년대 들어 사회적 변화를 도출하기 위한 직접적인 행동으로써의 문화적 실천과 더불어 이를 뒷받침하는 다양한 담론 생산에도 주력해왔으며, 문화적 소통을 사회적 실천과 결합하는 방법으로 문화행동을 표방했다.

‘컬처럴액션’은 목동예술인회관, 한·미 FTA, 한반도 대운하, 광우병 촛불, 용산참사, 콜트콜텍 기타노동자, 밀양 송전탑 등 한국 사회의 주요한 정치·사회적 현안에 참여하고 개입하는 문화예술적인 실천을 펼쳤다.

‘파견미술’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현장. | 사진 정택용

‘파견미술’의 한진중공업 희망버스 현장. | 사진 정택용

■ 파견미술
첨예한 현장 찾아 행동하는 예술

‘파견미술’은 첨예한 사회적 의제의 현장을 찾아 예술적 실천을 펼쳐온 행동예술 그룹이다. 그룹의 리더인 전미영을 비롯해 나규환, 문정현, 박정신, 송경동, 신유아, 윤성현, 이윤엽, 이윤정, 전진경, 정윤희, 박상덕 등 미술가들을 주축으로 종교인, 시인, 한의사 등 다양한 직업군들이 활동해왔다. 이들은 용산참사를 비롯해 기륭전자, 한진중공업, 부평 대우자동차, 콜트콜텍, 4대강 사업, 유성기업, 강정마을, 평택 쌍용자동차 등의 현장에서 행동예술을 실천했다. ‘파견미술’이라는 이름은 비정규직인 파견노동자의 정체성을 예술가의 소수자성과 행동가 정체성으로 연결한 것이다. 근대예술의 정체성은 예술가 주체의 자율성에서 나온다. 따라서 미술가들이 스스로 파견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는 일은 매우 낯설지만, 이들의 생각은 명쾌하게 ‘스스로를 현장에 파견하는 행동하는 예술가’에 닿아 있다.

오늘날 예술가의 자율성은 문화권력과 시장권력에 노출되어 간접적인 주문생산의 단계에 도달한 소극적 의미의 자율성으로 축소돼 있다. 갈등과 충돌이 벌어지는 사회의 장 속에서 예술적 실천으로 변화를 추구하는 실천가로서의 예술가 정체성을 추구한 ‘파견미술’은 동시대 미술의 난맥상을 극복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일반적인 예술운동이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하고, 예술의 관점에서 사회적 관계성을 구축하는 실천의 장이었다면, 행동예술은 예술 자체의 내재적 자율성이나 심미적 영역만이 아니라 예술의 사회적 개입, 문화정치적 맥락화 등을 통한 자기실천을 추구하는 장’이라는 관점에서 ‘파견미술’의 현장참여형 행동예술은 실천적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샐러드’의 퍼포먼스 ‘란의 일기’.

‘샐러드’의 퍼포먼스 ‘란의 일기’.

■ 샐러드
이주와 노동, 그 삶의 상처 보듬기

‘샐러드’는 이주노동자들로 구성된 극단이다. 극단장 박경주는 10여년간 이주와 노동의 문제를 다뤄온 예술가다. 그는 예술과 현실의 경계에서 상처를 치유하고 미래를 예언하는 예술가의 상상력을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해왔다. 나아가 국가·지역·인종·민족·계급의 이름으로 떠도는 노동과 비정주의 삶의 상처를 어루만지며 반자본의 이름으로 그 경계를 넘나드는 행동가다.

예술가이자 행동가의 정체성을 동시에 가지고 있는 그는 사진과 영상, 다큐멘터리 등 시각예술 작업을 하면서 동시에 이주노동자밴드를 만들어 공연과 음반 제작을 한다. 인터넷상에서 이주노동자방송국을 꾸리고, 그것을 샐러드TV와 극단샐러드로까지 진화시켰다.

다국적 이주민들로 구성된 사회적기업 ‘샐러드’는 2009년 1월 이주민 연극 아카데미를 열면서 시작됐다. 이들은 이주민과 정주민의 문화적 경계를 뛰어넘는 소통을 통해 문화다양성의 진정한 의미를 추구한다. 공연예술에서 전시회, 퍼포먼스, 다문화워크숍까지 문화적 약자인 이주민이 창작의 주체로 활동하면서 시혜적 관점의 상투적인 다문화활동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예술운동을 펼치는 것이다.

또한 국제이해교육과 다문화 인식 개선을 위한 공연 사업과 문화예술교육 사업, 다국어신문 제작 등의 폭넓은 활동으로 이주민의 삶과 노동을 한국 사회의 건강한 구성요소로 자리잡게 하는 문화운동으로 사회적 변화를 추구하는 행동예술을 지속하고 있다.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이 4대강 공사를 반대하며 분신한 문수스님을 추념하는 행동예술을 펼치고 있다.

‘리슨투더시티’의 박은선이 4대강 공사를 반대하며 분신한 문수스님을 추념하는 행동예술을 펼치고 있다.

■ 리슨투더시티
도시와 생태 현장의 실천가

회화를 전공한 박은선은 한동안 회화와 오브제 작업으로 주류 미술시장에 근접했던 유망작가였지만, 자본주의사회에서 예술가의 지위와 역할에 관한 근본적인 질문을 안고 새로운 길에 접어들었다. 그는 건축과 미술을 결합한 프로젝트 그룹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를 꾸리면서 행동예술가로 진화했다. 이 그룹의 구성원들은 한국, 영국, 오스트리아, 독일의 젊은 예술가·건축가들이다. 건축과 미술의 접점에서 메가 시티의 시나리오를 짜는 도시 미래주의 프로젝트 팀이다. 이들의 출발은 도시와 건축을 미술가와 건축가의 구별 없이 인문학적 관점에서 돌아보는 것이었다.

‘청계천 녹조라떼 투어’를 꾸리는 등 도시생태 의제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리슨투더시티’를 자연생태 공간으로 이끈 것은 4대강 공사다. 생명이 흐르는 강을 막아 토목공사의 욕망을 충족함으로써 생태 파괴는 물론 경제와 일상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 4대강 공사 현장에서 이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활동했다. 자본주의의 개발논리에 관한 비판적 메시지를 담은 작품은 물론, 내성천 살리기를 위한 한 평 땅 사기 등의 활동을 통해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의제를 다루는 현장의 실천가이자, 예술활동의 지평을 사회적 연대를 통한 소셜펀딩으로까지 확장하는 행동예술가로 진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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