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고 진한 만추의 묵향

한윤정 선임기자

수묵의 회화 정신 고수하면서도 변화의 고민과 흔적…수묵화 전시회 3개 잇달아

만추에는 묵향(墨香)이 제격일까. 수묵의 변화와 발전을 보여주는 전시가 잇달아 마련됐다. 중국이 종주국인 동아시아 전통 예술양식으로서 수묵은 지난 세기 서구식 근대화와 식민지배의 역사 속에서 다양한 부침을 겪었다. 낡은 전통으로 치부돼 폐기되거나 일본의 식민 지배 아래서 왜곡, 변형됐다. 종전 이후에는 끊어진 전통의 맥을 잇는 한편, 국경을 넘나드는 현대미술의 도전 앞에서 현대화라는 과제에 직면했다. 2000년대 수묵 작품에는 이 같은 고민과 흔적이 녹아 있다.

서울대학교미술관에서 열리는 ‘거시와 미시’전(22일까지)은 한국과 대만 수묵화의 흐름을 보여준다. 대만은 문화혁명을 겪은 중국에 비해 수묵전통을 충실히 잇고 있으며, 일본의 식민지배와 서구문화의 세례를 받았다는 점에서 한국과 공통점이 많다. 전시명에서 ‘거시’란 이런 역사적·지역적 맥락을, ‘미시’란 구체적 작품을 가리킨다. 양국 작가들은 수묵이란 재료와 일필휘지의 회화 정신을 고수하면서도 다양한 변화를 꾀했다.

(왼쪽부터)서세옥,<br />사람들, 2000년대, 한지에 수묵,173×139㎝ 정용국,<br />검은 안개, 2015, 한지에 수묵, 200×140㎝ 김호득,<br />꿈속의 구룡폭포,2015, 한지에 수묵, 131×297㎝

(왼쪽부터)서세옥,
사람들, 2000년대, 한지에 수묵,173×139㎝ 정용국,
검은 안개, 2015, 한지에 수묵, 200×140㎝ 김호득,
꿈속의 구룡폭포,2015, 한지에 수묵, 131×297㎝

한국 작가로는 신영상, 김호득, 김희영, 임현락, 정용국이 나왔다. 해방 이후 일제 잔재 청산과 현대화 모색 과정에서 수묵추상화의 중심이 된 서울대 동양화과 출신 작가들이다. 신영상(80)은 1967년 한국화회를 창단해 국내 수묵추상화의 기반을 다진 첫 세대로, 화면을 과감하게 분할하는 일획을 몬드리안의 추상에 비유하는 등 동서양을 아우른 보편성을 추구한다. 그의 초기 제자인 김호득(65)은 기존 형식을 벗어나면서도 산수의 개념, 무위자연이란 동양사상과의 연결을 유지한다. 김희영(60), 임현락(52)은 화면의 분할, 퍼포먼스와 같은 신체와 시간의 개입을 시도한다. 정용국(43)의 신세대 수묵화는 서양식 정원과 식물을 소재로 도입한다.

리이훙, 리마오청, 양스즈, 황보하오 등 대만작가들의 수묵에서는 여전히 자연이 절대적 위치를 차지해 폭포, 수목, 돌 등이 현대적 조형감각으로 표현됐다. 리이훙(74)은 격자로 분할한 화면에 돌이란 제재를 미니멀하게 담아냈으며, 리마오청(61)의 검은 화면은 무수한 가늘고 긴 붓질이 종횡으로 얽힌 자연물의 흔적이다. 젊은 작가 황보하오(34)는 수묵화 특유의 고전적 풍모와 무게감을 벗어나 감각적인 점·선·면의 표현에 먹을 사용한다.

산정 서세옥(86)은 수묵추상의 원조로, 서울대에 재직하면서 수많은 제자를 키웠다. 그의 평생에 걸친 작품세계를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열리는 ‘서세옥’전(1부 내년 1월3일, 2부 3월6일까지)에서 볼 수 있다. 그가 1950~2000년대까지 시기별 대표작 100점을 지난해 기증함에 따라 마련된 기증작품 특별전이다. 서세옥은 1949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 국무총리상을 수상하며 등단, 반세기 이상 한국화단을 끌어왔다. 전통의 회복과 새로운 문화의 수용이라는 과제 위에서 동양의 문인화 개념을 바탕으로 수묵추상이라는 새로운 경향을 주도했다. 1부는 1960년대 ‘유일한 전위적 청년들의 집결체’를 표방했던 묵림회를 통해 추구했던 수묵추상 작품들과 1970~1990년대까지 묵선과 여백의 공명만으로 인간형상 속 기운생동을 표현했던 ‘사람들’ 시리즈 50여점으로 구성됐다. 2부는 90년대부터 최근까지의 작품이 선보인다.

학고재갤러리(서울 삼청로)가 마련한 ‘당대수묵’전(29일까지)은 아시아 동시대 수묵의 새로운 담론을 만드는 장기 기획으로 마련됐다. 첫 회는 한국의 김선두 김호득 조환, 중국의 장위 웨이칭지 등 한·중 5인 그룹전이다. 전통 수묵에서 출발해 보다 다양한 매체와 폭넓은 표현으로 나아간 수묵의 변형을 확인하는 자리다.

동갑내기(57) 김선두와 조환은 채색화로, 철조각으로 수묵정신을 추구한다. 작가 이청준과 협업으로 대중과 친숙해진 김선두는 이씨의 소설 제목을 딴 신작 시리즈 ‘별을 보여드립니다’를 처음 선보였다. 삶에서 깨닫는 감동을 소박하게 표현하는 그림은 채색을 수십 번 중첩해 아래 색이 덧칠한 색을 통해 발색하게 만드는 장지기법과 함께, 역원근법이라는 특유의 시선을 보여준다. 조환은 붓과 종이가 아니라 철판과 절삭기로 글씨를 쓴다. 중국 당나라 서예가 장욱이 쓴 반야심경을 철에 새기고, 불교 설화에 등장하는 반야용선(극락정토로 가는 배)을 설치했다.

중국작가 장위(56)와 웨이칭지(44)의 작품에서는 중국의 개방과 경제성장의 현실을 읽을 수 있다. 장위의 ‘지인(指印·손도장)’ 연작은 전통 지두화(指頭화)의 방식을 빌려와 손가락으로 매니큐어를 찍어 종이나 유리판에 무수한 점을 만든다. 개인의 정체성(지인)이 사라지고 익명화된 중국 사회의 상징이다. 웨이칭지는 오성홍기와 파라마운트사와 퓨마의 로고 등을 섞은 수묵채색을 그림으로써 현대 중국작가의 혼성성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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