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토벤 악보·벼루에 새긴 ‘산다는 건 무엇인가’

도재기 선임기자

이상용 ‘운명을 노래하다’전

이상용의 ‘Fate’(운명), 혼합매체, 103x80cm. 갤러리bk 제공

이상용의 ‘Fate’(운명), 혼합매체, 103x80cm. 갤러리bk 제공

“자신의 삶을 한번쯤 성찰하는, 그런 작품이었으면 좋겠어요. 바쁘고 팍팍한 일상 속에서 나는 누구인지, 내 삶은 우연인지, 필연으로 이어지는지…. 그런 존재론적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도록 하는 거죠.”

작가 이상용(47)의 작품은 그 재료가 수백년 된 중고 벼루이든, 새 캔버스든, 닳고 닳은 강과 산의 돌이든 성찰적이고 명상적인 분위기가 강하다. 극히 절제된 벼루·돌 작품은 물론 캔버스 작업도 볼수록 마찬가지이다. 유한한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존재론적 물음을 품은 작품은 관람객과 자연스레 교감하며 성찰이 가능한 사유의 공간이 된다.

‘벼루 작가’라 불리는 이상용이 개인전 ‘운명을 노래하다(SONG OF FATE)’를 열고 있다. 갤러리bk(서울 이태원)의 재개관전이다.

이상용의 ‘Fate’(운명) 일부, 벼루. 갤러리bk 제공

이상용의 ‘Fate’(운명) 일부, 벼루. 갤러리bk 제공

서양화를 공부하고 미국 뉴욕에서 활동한 작가는 10여년을 훌쩍 넘긴 벼루 작업으로 국내외에 꽤 알려져 있다. 이번 작품전에는 벼루와 더불어 평면, 돌 작품과 설치작업도 선보이고 있다. 40대 소장 작가의 예술적 관심사, 그의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다.

그의 벼루 작품은 누군가 먹을 갈았던 옛 벼루를 구해 그 앞이나 뒷면에 나무나 인물, 산 등의 형상이나 한두 가닥의 선을 양각·음각한다. 벼루 특유의 깊은 먹빛의 맛, 오랜 시간을 말해주는 닳은 흔적과 그의 심상이 어우러져 관람객을 생각에 잠기게 한다. 벼루(inkstone)작품은 특히 미국·독일 등 해외에서의 반응이 좋아 전시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돌 작업은 전국의 산과 강에서 틈틈이 구한 평범한 작은 돌에 산과 물고기, 인물 등의 형상을 새긴다. 관람객의 일상을 환기시키는 작품이다. 그는 “오랜 시간의 풍파로 매끈해진 돌을 보면 우리의 삶, 인생과 닮았다는 생각을 한다. 최대한 손을 적게 대 관람객의 생각이 더 풍성해지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벼루나 돌 작품은 공들인 작업에 비해 드러나는 시각적 형상은 극히 절제되고 정제된다. 나무 한 그루나 엇갈리는 선 하나, 작은 산, 수만년 전의 동굴벽화를 떠올리게 하는 원초적 형상이 있을 뿐이다. 숱한 이야기를 하나로 응축시킴으로써 작품에는 특별한 사유의 공간인 여백이 생겨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내려놓음으로써 오히려 모든 것을 얻는’ 수도자의 수행 같다고나 할까.

평면 작업인 ‘악보 작품’은 베토벤의 교향곡 5번 ‘운명’ 등의 악보를 세밀하게 그린 뒤 그 위에 투명 스카치테이프를 붙이고, 또 악보를 그리고 테이프 붙이기를 반복한다. 많게는 10회에 이른다. 쌓이고 쌓인 흑백의 악보는 아련해지고 독특한 시각적 효과와 질감을 드러낸다. 작가는 그 위에 노랑·빨강·파랑 색으로 인물을 앉힌다. 인물상과 얽히고설킨 수많은 음표들, 마치 인간 군상과 그들의 희로애락으로 읽힌다.

‘캔버스를 엮은 작품’은 화면 일부에 캔버스 천을 서로 엇갈려 엮은 것이다. 뜨개질하듯 한 땀 한 땀 캔버스를 엮어 산을 형상화한 작품은 모습이 잘 드러나지 않아 오히려 몰입시킨다. “부산한 세상 속에서 어머니의 뜨개질 같은 느림의 미학, 일상 삶을 찬찬히 돌아보는 그런 여유를 가졌으면 한다”고 작가는 말했다. 이진명 간송미술문화재단 큐레이터는 “삶의 의미를 늘 되새기는 이상용은 작업 내용을 단순한 감각이나 즉흥적 정취로 선취하지 않는다”며 “매우 정교한 의미의 서사를 구축하고 있다”고 평한다. 오는 29일까지. (02)790-7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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