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듯 흐느끼듯 출렁이는, 저 겨울 바다

김종목 기자

강요배(사진)의 ‘불인’은 노자 <도덕경>의 ‘천지불인(天地不仁)’에서 따왔다. ‘하늘과 땅은 만물의 끊임없는 변화에 어진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연 그대로 행할 뿐’이란 뜻이다.

분노하듯 흐느끼듯 출렁이는, 저 겨울 바다

언뜻 보면 그림은 ‘불인’한 자연의 속성을 그대로 옮긴 풍경화다. 가장 불인한 계절 겨울 바다와 나무를 거칠고 묵직하게 드러낸다. 팽나무가 심어진 언덕 너머로 파도 분말(噴沫)이 가득하다.

강요배의 ‘불인(不仁)’은 제주 4·3 비극 중 하나인 ‘북촌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강요배의 ‘불인(不仁)’은 제주 4·3 비극 중 하나인 ‘북촌사건’을 그린 작품이다.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3.33×7.88m짜리 대작 ‘불인’은 제주도립미술관 ‘4·3 70주년 특별전 포스트 트라우마’전의 백미로 꼽힌다. 제주라는 공간, ‘트라우마’ 주제 아래 놓인 이 작품은 4·3의 고통을 담은 것이다. 작품 배경은 그저 황량한 겨울 바다가 아니다. 1949년 1월17일 해안마을 조천면 북촌리에서 일어난 ‘북촌사건’을 다룬다. 4·3에서 가장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다. 군인들은 주민 300여명을 사살했고, 가옥 1000여채를 불태웠다. 군인 2명이 무장대 기습을 받아 숨지자 ‘빨갱이 색출’을 명목으로 대량 학살한 것이다. 강요배는 주검도, 총칼도 그리지 않았다. 불에 그슬린 팽나무, 풀밭에 사그라지는 불꽃과 희미한 연기로 학살 현장임을 암시할 뿐이다. 4·3 희생자와 유족에게 제주 바다는 저렇게 보였을까? 어두컴컴한 바다에서 일어나는 물거품은 끊어낼 수 없는 비참과 통곡을 그린 듯하다.

‘동백꽃 지다’ 연작의 화가 강요배
죽음·총칼 아닌 황량한 자연으로
4·3의 비극 그린 대작 ‘불인’ 전시
역사 녹인 한국적 인상주의 평가

강요배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 4·3 증언과 기록으로 작업한 ‘동백꽃 지다’ 연작으로 유명하다. 그는 비극의 현장을 하나하나 옮기는 데 주력했다. 만 40세 고향 제주로 간 그가 화폭의 대상으로 삼은 건 자연이다. 미술평론가 이태호는 “1980년대 민중작가로, 1990년대 제주 4·3항쟁 연작을 완성해낸 화가로, 독서와 사색을 통해 진정한 인상주의적 자기 기풍을 창출한 화가”라고 말한다. 강요배의 인상주의는 역사를 함께 녹여냈다는 점에서 자연의 찰나와 인상, 직관만을 캔버스에 담은 서양 인상주의를 극복하려 한다.

강요배는 지난 24일 ‘포스트 트라우마 콘퍼런스 : 기억투쟁과 평화예술을 위하여’에 참석했다. 5시간에 걸친 콘퍼런스 내내 제자리를 지켰다. 사회자는 콘퍼런스 말미에 강요배에게 소감을 물었다. 그는 “(창작자가) 예술 작품을 만들면서 역사적 사건에 얼마나 개입해 들어갔을까”를 고민했다고 한다. 예술 작품의 출발점인 창작자와 역사의 재현을 동시에 고려하면 좋겠다고도 했다.

콘퍼런스가 끝나고 ‘불인’에 관해 물었다. 그는 “(‘불인’을 보고) 4·3을 느껴도 되고 자연을 느껴도 된다. 서로 연결되어 있고, 하나가 다른 하나를 내포하고 있다”고 말했다. ‘불인’을 두고 마음속에서 삼켜 내놓은 것이라고도 했다.

강요배는 이튿날 김포행 비행기를 탔다. 학고재 개인전 1부 ‘상(象)을 찾아서’(6월17일까지) 개막식에 참석했다. 개인전엔 2016~2018년 신작 30여점을 선보인다. 자연과 일상의 사물을 소재로 한 작품이 많다. 한라산 정상, 푸른 바다, 저녁 노을 같은 자연 풍경에 검정 고양이, 두부와 오이 같은 일상의 동물과 사물을 옮겼다. 4·3에 대한 직접 묘사를 줄이면서 ‘자연으로의 퇴각’이라는 지적도 나았다. 그는 화가로서 변화를 고민했다. 그 결과가 사물을 집중 관찰하는 것이다. 그는 자기가 바라본 세계의 모습을 단적으로 표현하길 기다린다고 말한다. 군더더기를 버리고 단순화해 명료하게 만들려 한다고도 했다. ‘상을 찾아서’는 그 결과물을 모은 것이다. 표현 양식도 포인트다. 강요배는 종이를 서너 겹 접은 ‘종이 붓’으로 작업한다. 거칠고 묵직하면서도 세세하게 자연을 그려내는 종이 붓 화법은 최고조에 이른 듯하다. ‘불인’처럼 4·3을 떼놓고 강요배를 말할 순 없다. ‘요배’라는 이름도 ‘철수’ 같은 흔한 이름을 피하려고 지은 것이다. 4·3 때 토벌대가 ‘빨갱이 색출’을 하면서 동명이인도 다 함께 죽였기 때문이다.

개인전 2부 ‘메멘토, 동백’은 6월22일부터 7월15일까지 열린다. ‘동백꽃 지다’ 같은 강요배의 역사화를 전시한다. 학고재 우정우 실장은 “2부는 그림 판매를 하지 않는다. 개인 소장자나 미술관에서 작품을 빌려 왔다. 시민 관람을 위해 기획한 전시”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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