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나’

홍진수 기자

학고재갤러리에서 ‘윤석남’전

여성의 강인함 그린 붓질 40년

자화상으로 내면의 깊이 더해

책가도를 배경으로 그린 자화상(왼쪽)과 작업실을 배경으로 그린 자화상. 작업실 뒤편 한가운데 윤석남의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 서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책가도를 배경으로 그린 자화상(왼쪽)과 작업실을 배경으로 그린 자화상. 작업실 뒤편 한가운데 윤석남의 어머니를 그린 작품이 서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한국의 ‘1세대 페미니즘 작가’로 꼽히는 윤석남(79)은 마흔살까지 전업주부였다. 어린 시절부터 화가가 되고 싶었으나 가정 형편 때문에 꿈을 접었다. 그러나 ‘표현하고 싶은 욕망’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강해졌다.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더 살 수가 없을 정도였다.

마흔살에 다시 붓을 잡았다. 이미 정규 미술교육을 받을 시기는 지나 있었다. 처음에는 유명한 시인 박두진에게 서예를 배웠고, 이어 이종무 화백의 개인 화실에서 교습을 받았다. 그 뒤로는 전력을 다해 그림을 그렸다.

윤석남은 주로 여성, 그중에서도 자신의 어머니를 많이 그렸다. 1982년 첫 개인전부터 지금까지 쭉 여성의 강인함을 ‘어머니’로 상징하는 작품을 만들었다. 이매창, 허난설헌 등 역사 속에 등장한 여성들을 그린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40년 동안 쉬지 않고 여성을 그려왔지만, 윤석남은 계속 ‘미완’이란 느낌을 받았다. 아직 제대로 그리지 않은 여성이 남아 있었다. 바로 자신이었다.

4일부터 다음달 14일까지 서울 종로구 소격동 학고재갤러리에서 열리는 ‘윤석남’전은 작가가 자기 이야기를 처음 본격적으로 선보이는 자리다. 전시하는 신작 13점 중 8점이 자화상이다. 나머지 5점 중 3점은 어머니와 언니, 여동생, 딸과 함께 찍은 ‘여성만의 가족사진’을 그린 ‘우리는 모계가족’ 연작이다. 설치미술 작품인 ‘핑크룸Ⅴ’ 속 소파에 앉은 여성 역시 작가 자신이다. 윤석남의 얼굴이 없는 작품은 조선시대의 기생이자 여류시인인 이매창 초상화 1점뿐이다.

윤석남이 학고재갤러리에 설치된 ‘핑크룸Ⅴ’ 앞에 앉아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윤석남이 학고재갤러리에 설치된 ‘핑크룸Ⅴ’ 앞에 앉아 있다. 학고재갤러리 제공

윤석남이 자화상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어떻게 그려도 상관없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주변의 여성 30명의 초상화를 그리고 싶었지만 쉽게 붓을 들지 못했다. 나를 그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나부터 시작했다. 자화상을 그리다 보니 내 안이 들여다보였다.

자화상들은 모두 한지에 채색화로 그렸다. 윤석남은 2015년부터 민화에 관심이 생겨 배우러 다니고 있다. 자화상 중 하나의 배경은 아예 대표적 민화 중 하나인 ‘책가도’로 삼았다. 윤석남은 “억압적인 조선 사회에서 채색화(민화)는 꿈을 펼치는 상징이고, 꿈을 그리는 그림이었을 것”이라며 “채색화에는 희망이 깃들어 있다”고 말했다.

자화상을 그린다고 해서 다른 이들의 초상화를 포기한 것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그릴 참이다. 윤석남은 여전히 역사 속 여성에 대한 애정이 깊다. 최근에는 한국 최초로 고공농성을 벌인 여성노동자 강주룡의 이야기에 끌린다고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96년 처음 선보인 ‘핑크룸 시리즈’의 5번째 작품도 볼 수 있다. 그림을 시작하기 전, 중산층으로 안정된 삶을 살면서도 끊임없이 불안감에 시달렸던 작가의 내면을 표현한 작품이다. 항상 욕구를 억누르고 규정된 틀 안에서 살아야 하는 여성의 삶을 보여주는 작품이기도 하다. 형광분홍색으로 치장된 소파의 다리는 날카로운 가시처럼 뾰족하고, 주변에는 분홍색 구슬이 흩뿌려져 있다. 윤석남은 “불안하던 그때의 심리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요즘도 가끔 악몽을 꾼다”고 말했다.

윤석남은 40년간 억눌렀던 감정과 욕구를 지난 40년간 전력으로 표출해왔다. 이제는 여한이 없을까. 곧 만으로 80세가 되는 노작가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도 하고 싶은 말이 있고, 그리고 싶은 그림이 너무 많다. 민화도 더 배워야 하고. 그래서 오래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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