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전 활동 담은 ‘영화·전시회’ 한국서 나란히 선보여
귀화 거부…딸에겐 한국 이름
제주 ‘수풍석미술관’ 등 유명
정다운 감독, 유족 허락받아
작품세계 조명…15일 개봉
웅갤러리, 그림 25점 전시도
시절이 수상하다 보니 그의 국적부터 이야기해야겠다. 한국과 일본에서 주로 활동한 건축가 이타미 준(1935~2011)은 한국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났고, 일본에서 활동했지만 귀화하지 않았다. 평생 유동룡(庾東龍)이란 이름의 한국 여권을 들고 다녔다. 딸에게는 이화여대를 가라고 ‘이화’란 이름을 지어줬다.
이타미 준은 건축가 유동룡의 ‘필명’이다. 그는 한국에도 그리 많지 않은 무송 유(庾)씨다. 일본에서는 이 한자를 쓰지 않는다. 활자 자체가 없으니 책을 낼 때도 홍보물을 찍을 때도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필명을 지었다. 이타미란 성은 그가 처음 한국을 찾을 때 이용한 오사카의 국제공항 이름이다. 준은 의형제처럼 지냈던 작곡가 길옥윤(1927~1995)의 일본 예명(요시야 준)에서 따왔다.
이타미 준은 1935년 일본 도쿄에서 태어났다. 원래 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반대 등으로 일본 무사시공업대학 건축학과에 진학했다. 1968년 이타미 준 건축연구소를 설립하고 독자적인 건축세계를 구축하기 시작했다. 2005년 프랑스 예술문화훈장 ‘슈발리에’, 2006년 김수근문화상을 받았고 2010년에는 일본 최고의 건축상인 ‘무라노도고상’을 수상했다. 한국에서는 제주도에 있는 ‘포도호텔’ ‘수풍석미술관’ ‘방주교회’ 등이 유명하다.
오는 15일 개봉하는 영화 <이타미 준의 바다>는 그의 작품세계를 상세히 담은 다큐멘터리다.
영국에서 ‘건축과 영상’을 공부한 정다운 감독이 8년에 걸쳐 제작했다. 2011년 이타미 준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뒤 유족을 찾아가 허락을 받았다. 정 감독은 지난 1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2006년 제주에서 수풍석미술관을 보고 굉장한 충격을 받았다”며 “이타미 준이 (건축을 통해) 전달하고 싶었던 따뜻한 치유와 위로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도 (영화로) 전달하고 싶다는 생각에서 출발했다”고 말했다. 음악은 이타미 준처럼 재일교포인 음악가 양방언이, 내레이션은 배우 유지태가 맡았다.
이타미 준은 집을 지으면서 자연을 거스르지 않으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 땅에 살아왔고, 살고 있고, 살아갈 이의 삶과 융합한 집을 짓는 것’이 꿈이자 철학이었다. 대표작인 서귀포 포도호텔은 오름과 초가집 모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다. 밖에서 보면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데 안으로 들어서면 올레길이 펼쳐진다. 수(물), 풍(바람), 석(돌)미술관은 이타미 준과 건축주가 술자리에서 의기투합해 만들었다. 다른 작품을 전시하는 곳이 아니라 3개의 건물 자체가 미술품이자 명상의 공간이다.
영화는 일본과 한국, 그중에서도 제주를 오가며 이타미 준을 조명한다. 이타미 준의 큰딸인 건축가 유이화, 일본의 건축가 구마 겐고와 반 시게루 등이 자료영상과 함께 그와의 추억을 이야기한다. 이타미 준이 처음으로 공사를 맡았던 아파트의 주인, 저렴한 가격에 설계를 해줬던 주점의 사장 등도 등장한다. 그러나 영화 주인공은 사람도 건물도 아니다. 이타미 준이 그토록 건물에 담고 싶어 했던 자연과 그 주변의 정서다. 정다운 감독은 “이타미 준은 ‘땅의 위치마다 다른 바람이 분다, 그 바람의 노래가 들려주는 언어를 들어라’라고 했다”며 “제목에 바다를 넣은 것도, 바다에는 물과 돌, 바람이 함축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큐멘터리지만 이례적으로 ‘배우’가 출연한다. 이타미 준을 연상시키는 노인과 손자 같은 아이가 중간중간 등장한다. 노인 역할은 국민대 명예교수를 지낸 박길룡 건축가가 맡았다. 아이는 영화 말미에 노인에게 “할아버지, 여행이 어땠어요”라고 묻는다. 정다운 감독은 “한마디 대사 외에 아이와 노인의 시선, 작품 안에서의 반응은 연출하지 않고 그대로 담았다”며 “재연을 하려는 것이 아니고, 이를 통해 (관객들이) 인생을 되돌아보는 메타포(은유)로 작용하기를 바랐다”고 말했다.
이타미 준은 건축가가 아닌 화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7일부터 서울 종로구 홍지동 웅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전시회 ‘이타미 준-심해(心海)’에서는 그의 회화 작품 25점을 볼 수 있다. 이타미 준은 회화와 건축을 분리하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는 ‘화가이자 건축가’라고 했다. 재일교포 화가 곽인식(1919~1988)을 스승이자 아버지로 모셨고, 이우환(83)과도 어울렸다. 이타미 준의 회화는 거의 (붓이 아닌) 손으로 그린 그림이다. 유이화는 지난달 31일 열린 전시 기자간담회에서 “아버지는 매일 밤 약주 한잔을 하신 뒤, 재즈를 틀어놓고서는 그림을 그리셨다”며 “캔버스에 손을 올려놓은 뒤 ‘나는 이렇게 연주해’라고 말씀하시던 것이 기억이 난다”고 했다. 또 “건축물을 설계할 때도 끝까지 컴퓨터를 쓰지 않고 손으로 도면을 그렸다”며 “이런 때일수록 손의 흔적을 알려야 하고 손의 온기로 만드는 건축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고 말했다. 전시는 다음달 9월7일까지 이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