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과 남성의 시선은 다르다

김창길 기자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 바네사 벨이 그린 <3기니> 표지, 영국 호가스 출판, 1938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 바네사 벨이 그린 <3기니> 표지, 영국 호가스 출판, 1938

버지니아 울프에게.

가을 하늘이 높습니다. 그곳 날씨는 어떤가요? 며칠 전, 사진 구경하러 대구에 다녀왔습니다. 코로나19, 지구의 온난화, 넘쳐나는 플라스틱 쓰레기와 환경오염, 쫓겨난 난민들, 그리고 차별과 폭력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모습들…. ‘누락된 의제-37.5도 아래’라는 주제로 전시된 대구사진비엔날레의 사진들입니다. 무심코 지나쳤던 세상의 어두운 그림자들이죠. 서울로 향하는 기차에 올라 차창 밖에 펼쳐지는 흔해빠진 풍경들을 멍하니 바라보다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중년의 남자 관람객인 나는 여성 작가들이 제기한 누락된 의제들을 얼마나 이해했을까?” 그리고 당신의 모습이 떠올라 펜을 들었습니다.

자기만의 방에서 당신이 쓴 편지 <3기니>를 읽었습니다. 80여년 전에 발송된 편지인데, 지금에야 읽어본다니 부끄럽습니다. 지금까지 당신의 편지를 읽지 않았어도 살아오는 데 불편함이 없었던 남성이기 때문일 겁니다. 편지를 다 읽고 나니 내 딸이 대학에 가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것이 버지니아 울프 당신을 비롯한 교육받은 여성들의 노력 덕분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늦었지만,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당신이 살던 시대의 영국 사람들은 서아프리카 기니에서 채취한 금으로 만든 동전 ‘기니’를 사용했다고 하죠. 여성들이 가난할 수밖에 없는 시절, 3기니는 당신 같은 교육받은 여성들에게도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당신은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3기니를 내놓았죠. 1기니는 여성 대학을 설립하기 위해, 또 다른 1기니는 여성들의 전문직 진출을 돕는 단체에 기부했습니다. 전쟁이란 결국 교육받은 남성들이 지배하는 세상의 폭력이기 때문에 전문직에 진출한 여성들이 많아져야 세상이 바뀐다고 당신은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당신은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지는 않았던 것 같군요. 나머지 1기니는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남성들에게 보내셨죠.

스페인 내전의 참상을 기록한 사진 이야기를 하셨죠? 죽은 돼지의 몸통처럼 보였던 절단된 시신들과 폭탄에 허물어져 버린 집들이 찍힌 사진들이었죠. 피카소가 그렸던 스페인 북부의 작은 마을 ‘게르니카’였을까요? 그런데 당신이 실제로 편지에 첨부한 사진들은 전쟁 사진이 아니었습니다. 메달과 훈장을 주렁주렁 달고 있는 장군들, 긴 가운을 걸친 판사와 교수들, 화려한 금장식을 걸친 대주교를 찍은 인물 사진들입니다. 모두 남성들이죠. 교육받은 남성들의 의상들은 위압감을 풍깁니다. 반면 여성의 옷은 당신이 지적한 것처럼 남성의 시선을 끌며 유혹하기 위한 의상들입니다.

하이패션 범죄 현장 - 무제(‘Untitled (Metro series)’ from the series High Fashion Crime Scenes). Digital Pigment Print, 121.9x162.1cm, 2004 ⓒ멜라니 풀런, 대구사진비엔날레 제공

하이패션 범죄 현장 - 무제(‘Untitled (Metro series)’ from the series High Fashion Crime Scenes). Digital Pigment Print, 121.9x162.1cm, 2004 ⓒ멜라니 풀런, 대구사진비엔날레 제공

당신의 생각을 알고 있을 법한 사진가 멜라니 풀런의 사진들을 편지봉투에 넣어 보냅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명품을 걸친 여성들이 살해당한 장면들을 연출해 찍은 ‘하이패션 범죄 현장(High Fashion Crime Scenes 2003-2017)’ 연작입니다. 제목처럼 사진은 범죄 영화의 한 장면(Scene)을 보는 것 같습니다만 그녀는 LA 경찰과 검시관들의 수사기록을 참고했다고 작가 노트에 적어 놓았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이 열렸던 유니언 스테이션을 비롯한 지하철역, 한밤중의 부둣가와 놀이공원, 새벽 무렵의 텅 빈 거리와 다리 밑에 주차된 택시, 버려진 공장과 공사장, 그리고 교외의 한적한 호숫가는 여성들이 살해당한 범죄의 현장들입니다. 안전한 집을 벗어난 대가라고 할까요.

‘하이패션 범죄 현장’의 사진들은 데이비드 핀처 감독의 영화 <조디악>을 떠오르게 합니다. 당신은 타인의 자서전과 신문을 읽으며 시대의 분위기를 파악했지만 지금은 대중문화와 시각 미디어를 많이 참고합니다. 현실도피적인 영화들과 소비문화를 부추기는 광고 이미지들이 대표적이죠. 대구사진비엔날레 주제전시를 기획한 정훈 계명대 사진미디어과 교수는 멜라니 풀런이 “일상에서 무심코 소비해온 상품화된 여성 이미지와 소비 대상으로서 여성을 바라보는 내밀한 시각성을 매력적으로 재현”했다고 설명합니다.

‘하이패션 범죄 현장-무제, 2004’를 살펴볼까요? 금팔찌와 보석으로 장식된 핸드백, 하이힐을 신고 금빛 드레스를 입은 여성의 머리에서 검붉은 피가 흘러내립니다. 지하철은 이미 출발했습니다. 지하철 살해 장면을 담은 그녀의 사진은 신디 셔먼의 사진 ‘무제#143’(1985년)을 떠오르게 합니다. 신디 셔먼은 1950~1960년대 할리우드 영화에 출연했던 착한 여성들의 모습들을 조롱하며 스스로 모델이 되어 카메라 앞에서 포즈를 취했습니다. ‘무제 영화 스틸’ 연작이었죠. 멜라니 풀런의 ‘하이패션 범죄 현장’은 신디 셔먼의 ‘무제 영화 스틸’의 속편을 보는 듯합니다. 시대는 다르지만 두 작가 모두 남성의 시선이 아닌 여성이 스스로 바라본 여성의 모습들을 재현합니다.

아름다운 집: 전쟁을 집으로 가져오기 - 포토 옵(‘Photo Op’ from the series House Beautiful: Bringing the War Home, Digital Pigment Print, 340x400cm, 2004 ⓒ마사 로슬러, 대구사진비엔날레 제공

아름다운 집: 전쟁을 집으로 가져오기 - 포토 옵(‘Photo Op’ from the series House Beautiful: Bringing the War Home, Digital Pigment Print, 340x400cm, 2004 ⓒ마사 로슬러, 대구사진비엔날레 제공

여성과 남성의 응시가 다르다는 점을 고발하는 작품을 하나 더 볼까요? 개념 예술가 마사 로슬러의 포토몽타주 작품 ‘포토 옵(Photo Op: 포토타임과 비슷한 뜻, 2004)’입니다. 속옷 수준으로 노출이 심한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입은 금발의 날씬한 여성이 휴대폰에 연결된 남성을 바라봅니다. 남자는 여자를 보고, 여자는 남자가 보는 그녀 자신을 관찰한다는 존 버거의 말이 떠오르는 시선의 구성이죠. 똑같은 여성을 복사해 붙인 것은 남성으로부터 대상화된 여성의 이미지가 획일적으로 반복 재생산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시선에 대한 마사 로슬러의 고민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녀는 이라크전쟁과 아프가니스탄전쟁의 사진들을 가위로 오려서 중산층의 넓은 거실 창에 붙여 놓았습니다. 희생당한 어린이들은 아예 집 안으로 들여옵니다. 포토몽타주 연작 ‘아름다운 집: 전쟁을 집으로 가져오기, 2004-2008’입니다. 50여년 전의 베트남전쟁을 다룬 자신의 방식을 다시 반복한 작품들입니다. 정훈 교수는 마사 로슬러의 포토몽타주가 “타자의 공간 및 그를 구획하는 시각성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며 “집의 안과 밖, 열림과 닫힘의 비대칭성”을 나타낸다고 설명합니다. 타자의 공간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창밖의 세상이고 휴대폰에 연결된 남성의 세계입니다. 반면 여성의 몸은 집에 갇혀 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을 던져봅니다. 거실의 창과 휴대폰의 화면은 세계를 보여주는 열린 창일까요, 아니면 날것의 세계가 선별되는 거름망 같은 것일까요?

질문에 답하기 전에 스페인 내전 사진 이야기를 좀 더 하기로 하죠. 당신이 받아본 혐오와 공포감을 주는 전쟁의 사진들은 스페인 정부가 반전 여론을 조성하기 위해 영국에 보낸 것은 아니었다 하죠. 적군의 잔혹함을 선전하기 위한 정치적인 프로파간다였습니다. 사진은 구호가 필요 없는 선전선동의 도구로 쓰일 때가 많습니다.

총을 맞고 쓰러지는 스페인 병사를 포착한 로버트 카파의 사진을 보셨나요? 사진 중심으로 편집한 미국 잡지 라이프에도 실렸죠. 죽음의 문턱을 넘어서는 순간을 포착한 카파의 보도사진 옆에는 멋쟁이 중년 남성의 사진이 실려 있습니다. 남성 헤어 미용제품 광고입니다. 자본의 논리에 자유로운 미디어는 없습니다. 다큐멘터리 사진과 르포 기사가 묘사하는 타인의 고통에 몸을 떨던 독자들은 라이프라는 잡지 제목처럼 멋진 삶을 약속하는 다른 페이지의 광고를 보며 판타지에 빠져듭니다. 타인의 고통은 이색적인 구경거리였던 셈이죠. 철학자 한스 블루멘베르크는 해안가에서 난파선을 구경하는 재미를 노래한 로마인 루크레티우스의 시를 자신의 책 <난파선과 구경꾼>에 인용합니다. 관찰자가 안전하고 단단한 땅 위에 있다면 한 척의 배가 거친 파도에 휩쓸려 뒤집어지는 광경을 구경하는 것은 일종의 즐거움이라는 것이죠. 수전 손태그도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 사진을 보는 구경꾼의 속성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마사 로슬러의 구경꾼은 안락한 집에 머물고 있습니다. 미니드레스를 입은 그녀는 안전하다고 할 수 있죠. 하지만 마사 로슬러는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아름다운 집: 전쟁을 집으로 가져오기’라는 작품 제목처럼 전쟁 장면을 집으로 가져옵니다. 안전한 거리 두기가 몽타주 기법으로 제거된 것입니다. 이제 작품 속의 금발 여성은 더 이상 안전하지 않습니다. 마사 로슬러의 작품을 보는 구경꾼도 당황합니다.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아주 먼 곳에서 일어나고 있을 것 같은 장면들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거꾸로 생각해볼 수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집을 전쟁터로 가져가기. 미디어에 중독된 여성이 창밖에서 일어나고 있는 실재의 전쟁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모습일 수도 있습니다.

당신의 편지 <3기니>에서도 이런 사유의 흔적을 찾을 수 있습니다. 당신은 스페인 전쟁의 사진들을 반복해서 이야기하며 교육받은 권위적인 남성들의 인물 사진을 교차시킵니다. 언뜻 거리가 있어 보이는 사진이지만 당신은 이 두 장면이 공모관계를 형성한다고 암시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특정 인물의 사진을 꺼내 들며 쐐기를 박습니다. 훈장들과 기이한 표상들이 달린 제복을 입고 완벽한 남성성의 정수를 보여주는 ‘두체’(총통)라 불리는 남성이죠. 당신은 편지에서 전쟁이란(스페인 내전 사진) 결국 남자들의 세계였다는(교육받은 남성, 히틀러와 무솔리니 사진) 점을 포토몽타주처럼 보여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창밖의 전쟁과 휴대폰 화면의 남성을 오려 붙인 마사 로슬러의 작품도 마찬가지입니다. 차이점이 있다면 당신은 보도사진들이 공포와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며 전쟁을 중단시킬 수 있는 사유를 촉발시킨다고 생각했지만 마사 로슬러는 전쟁 보도사진들이 하드코어의 구경거리로 소비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죠.

피파 바카의 여행 중인 신부(from the project Bride’s on Tour, Digital Pigment Print, Dimension Variable, 2008. Photographed by Danilo Borrelli) /대구사진비엔날레 제공

피파 바카의 여행 중인 신부(from the project Bride’s on Tour, Digital Pigment Print, Dimension Variable, 2008. Photographed by Danilo Borrelli) /대구사진비엔날레 제공

혹시 여행 중인 신부 ‘피파 바카’를 만나보셨나요? 서른세 살의 이탈리아 여성인데요, 피파 바카는 친구와 함께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밀라노를 출발해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히치하이킹 여행을 떠났습니다. 크고 작은 분쟁이 일어나는 이슬람 지역을 타인의 차를 타고 여행하는 것은 무척이나 위험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3기니 중 1기니를 남성들에게 기부한 당신처럼, 사람에 대한 믿음이 강했습니다. 피파 바카의 ‘여행 중인 신부(Brides on Tour, 2008)’는 타인의 고통을 구경하지 않고 거친 파도가 몰아닥치는 바다로 떠나는 행위예술이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녀의 배는 난파됐습니다. 남자들은 피파 바카가 건네는 화해의 손짓을 무참히 짓밟았습니다. 레바논 베이루트에서 만나자며 터키 이스탄불에서 친구와 헤어졌던 피파 바카는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습니다.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았던 당찬 그녀의 모습을 이제 여기서는 볼 수 없습니다. 그곳에 같이 있다면 그녀의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보셨나요? 피파 바카도 두려운 적이 있다고 하더군요. 비 오는 날이었죠. 사람들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비를 맞으며 길거리에 서 있는 30대 여성이 내미는 손짓을 외면했습니다. 그녀의 실망감은 비에 젖은 웨딩드레스의 무게보다 더 무거워졌을 겁니다. 하얀 웨딩드레스는 무방비 상태의 여성이 다른 민족과 다른 나라들에 건네는 결혼식 초대장 같은 것이었는데 말이죠.

피파 바카가 그곳에 간 지 벌써 13년이 흘렀네요. 그녀는 아직도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나요? 아직 못다 한 히치하이킹 여행을 하려고 엄지척을 하고 있나요? 불편한 복장으로 여행을 하느라 자기 자신도 지쳤을 텐데 타인의 발을 정성스레 씻겨주던 그녀의 모습이 선합니다. 오늘 날씨는 어떤가요? 여기는 가을 하늘이 높습니다. 여행을 떠나고 싶은 날씨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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