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 가능한 모든 인간이 여기 있다…여러 사건 뒤 재개관한 리움 미술관

김종목 기자

리움 미술관이 지난 8일 재개관했다. 재개관은 일련의 사건들의 연장선상에서 봐야 한다. 2008년 삼성그룹 불법비자금 의혹 특검 사건 때 당시 홍라희 관장이 사퇴했다. 리움은 기획전은 멈추고 상설전만 진행했다. 2년 8개월가량 상설전만 하다 2010년 8월 ‘미래의 기억들’로 기획전을 재개했다. 이듬해 3월 홍 전 관장도 복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구속되던 2017년 3월 홍 전 관장은 두 번째로 관장직을 내려놓았다. 홍 전 관장 측은 “일신상의 이유”라고 했다. ‘내부 갈등’ 등 여러 소문이 돌았지만 확인된 건 없다. 리움은 다시 상설전만 열다가 2020년 2월 코로나19 감염 확산 이후 휴관에 들어갔다. 이번 재개관은 두 번째인 셈이다.

앞쪽부터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 안토니 곰리의 ‘표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Ⅲ’. 오른쪽은 ‘거대한 여인 Ⅲ’ 별도 촬영. 리움 제공·김종목 기자

앞쪽부터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 안토니 곰리의 ‘표현’,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Ⅲ’. 오른쪽은 ‘거대한 여인 Ⅲ’ 별도 촬영. 리움 제공·김종목 기자

리움 재개관 여부는 미술계 초미의 관심사였다. 미술평론가 홍경한씨는 “미술계에선 이 부회장 가석방을 전후로 가동을 멈춘 리움 정상화를 조심스럽게 점쳤다. 재개관은 문화예술 향유 욕구 충족·미술시장 활성화라는 측면 말고도 불법비자금 의혹 특검 여파로 휴관과 재개관을 반복한 플라토미술관의 전례를 답습하는 게 아닌가 했던 일각의 우려가 기우였음을 확인하는 의미도 있다”고 말했다.

‘이건희 컬렉션’ 반향이 재개관을 앞당긴 듯도 하다. 올해 상반기 미술계 키워드는 ‘이건희 컬렉션’이었다. ‘이상 과열’ 현상이 빚어졌다. 전국 지자체가 ‘이건희 미술관’ 유치에 달려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 ‘이건희 컬렉션’ 전시엔 암표까지 등장했다. 한때 ‘이건희 컬렉션’과 삼성문화재단 소장품은 비자금 온상으로 지목됐다. 컬렉션과 소장품에 대한 대중의 부정적 시선이 어느새 우호적으로 바뀐 것이다.

김홍도, ‘군선도’, 1776, 종이, 수묵담채 132.8×575.8㎝. 리움 제공

김홍도, ‘군선도’, 1776, 종이, 수묵담채 132.8×575.8㎝. 리움 제공

리움이 경쟁 상대를 구겐하임 같은 해외 유수의 미술관으로 상정할 때 자신감의 근거가 소장품이다. 재개관 전을 둘러본 한 미술계 관계자는 소장품을 두고 “현기증이 날 정도다. 비엔날레 급”이라고 했다. M1 ‘한국 고미술 상설전’엔 160점(국보 6점, 보물 4점, 현대미술 6점)이 나왔다. 국보는 ‘청자동채 연화문 표형 주자’, 김홍도의 ‘군선도’ 등이다. 고려 말~조선 초에 제작된 유일한 팔각합인 ‘나전팔각합’도 새로 선보인다.

고미술 상설전 1층 전시 전경. 왼쪽 유리벽 속 작품은 고려 시대 ‘금동 대탑’. 리움 제공

고미술 상설전 1층 전시 전경. 왼쪽 유리벽 속 작품은 고려 시대 ‘금동 대탑’. 리움 제공

4개 층에 각각의 주제를 부여했다. 4층 ‘푸른빛 문양 한 점’엔 청자 47점을 내놓았다. ‘청자상감 운학모란국화문 매병’, ‘청자상감 국화모란문 호’, ‘청자양인각 모란문 방형 향로’ 등을 새로 공개한다. 3층 ‘흰빛의 여정’엔 ‘분청사기조화 모란문 편병’ 등 분청사기와 백자 50점이 나왔다. 백자 재료인 고령토로 그림을 그려낸 정상화의 ‘무제 86-2-28’ 등을 함께 전시하며 현대미술과의 접목을 시도했다. ‘군선도’와 정조 대규모 행차를 묘사한 ‘환어행렬도’ 등 조선시대 그림·글씨를 2층 ‘감상의 취향’ 섹션에 배치했다. 1층 ‘권위와 위엄, 화려함의 세계’엔 불교미술과 공예품 43점을 전시한다.

이불의 ‘사이보그 W1, W2, W4, W6’, 1998~2001. 리움 제공

이불의 ‘사이보그 W1, W2, W4, W6’, 1998~2001. 리움 제공

‘현대미술 상설전’도 3개 층마다 각각 ‘검은 공백’, ‘중력의 역방향’, ‘이상한 행성’이란 주제를 달아 소장품을 전시했다. 리움은 현대미술 상설전 출품작의 절반가량을 처음 공개한다. 국내 작가로는 최만린의 ‘현’, 최욱경의 ‘레디와 백조’, 배영환 ‘남자의 길-완전한 사랑’, 이불의 ‘몬스터: 블랙’, 최우람 ‘쿠스토스 카붐’ 등이다. 해외 작가 작품은 아니쉬 카푸어의 ‘이중 현기증’, 볼프강 라이프의 ‘장소도 시간도 실체도 없는’, 폴 매카시의 ‘설백 난쟁이’이다.

재개관 하이라이트는 기획전이다. 리움이 4년 만에 내놓은 기획전 주제는 ‘인간, 일곱 개의 질문’이다. 130개 작품을 ‘거울보기’, ‘펼쳐진 몸’, ‘일그러진 몸’, ‘다치기 쉬운 우리’, ‘모두의 방’, ‘초월 열망’, ‘낯선 공생’ 등 7개의 소주제로 배치했다. 전시장 M3 1층에서 지하로 내려가는 복도에 알베르토 자코메티의 ‘거대한 여인Ⅲ’, 내리막 중간에 안토니 곰리의 ‘표현’, 끝에 조지 시걸의 ‘러시 아워’를 인트로 작품으로 배치했다. 대가 3명의 일련의 조각을 두고 곰리의 말을 인용해도 좋을 듯하다. “그것들(내가 만든 형상들)은 단순히 움직이는 세상에서 정지한 오브제로서 존재한다. 그것들에 의미가 있다면. 오직 그 형상들을 둘러싼 주변에서 체험된 시간에 대해 그것이 반응할 때에만 생겨난다. … 내 작품은 방안이나 천장, 벽 또는 길 위처럼 일상의 흐름 속에 섞여 들어갔을 때 최고의 상태에 이른다. 첫눈에는 그것들이 조각상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저 생의 한순간이 물질화된 것이다. 그것들은 특정한 시간에 특정한 신체가 점유했던 공간을 보여주지만. 이 공간은 누구라도 차지할 수 있음을 넌지시 드러낸다”(<게이트웨이 미술사> 중). ‘거대한 여인Ⅲ’과 ‘러시 아워’는 리움 소장품이다.

왼쪽부터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그(블랙)’, 신디 셔먼의 ‘무제’, 최하늘의 ‘샴 2: 자웅동체’와 ‘다각’. 벽면 사진 작품이 야스마사 모리무라의 ‘두블르나쥬(마르셀)’이다. 김종목 기자

왼쪽부터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그(블랙)’, 신디 셔먼의 ‘무제’, 최하늘의 ‘샴 2: 자웅동체’와 ‘다각’. 벽면 사진 작품이 야스마사 모리무라의 ‘두블르나쥬(마르셀)’이다. 김종목 기자

이번 기획전은 리움의 이전 전시와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파격적이다. 상상 가능한 모든 인간의 모습과 행위를 재현했다. 재현 대상은 보통 사람들에서, 마릴린 먼로 같은 스타, 제1차 세계대전 부상자 등이다. 사이보그 인간과 반인반수 괴물도 재현 대상이다. 뒤틀리거나 절단된 인간의 신체에다 인간 잔혹성을 드러내는 작품도 여럿이다. 미술관은 전시도록에 “몸은 하나의 거대한 이성이며, 하나의 의미를 지닌 다양성이고, 전쟁과 평화이자, 가축의 무리이자 목자”라는 니체의 말도 인용했다.

기획전은 지금 한국에서 뜨거운 이슈인 ‘젠더’ 문제를 끌고 왔다. ‘모두의 방’ 섹션이 성·인종·계급과 혐오·편견·차별을 다룬다. “분장을 통해 사회적으로 규정된 여성성의 틀을 무효화”한 신디 셔먼의 거대한 벽지 작업 ‘무제’, “아시아 게이 남성의 이중적 한계를 해체하고 복합적 정체성을 체현”한 야스마사 모리무라의 ‘두블르나쥬(마르셀)’, “덴마크의 랜드마크인 인어공주상의 남성 버전을 통해 문화적 상징성을 전복”하는 엘름그린 & 드라그셋의 ‘그(블랙)’, “(자웅동체로) 남성중심적인 한국 모더니즘 조각의 역사적 위계와 관습적 편견을 해체”하는 최하늘의 ‘다각’과 ‘샴 2: 자웅동체’를 한데 배치했다.

왼쪽이 신디 셔먼의 ‘부서진 인형’, 가운데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유방’, 오론쪽이 로버트 롱고의 ‘이 좀비들아: 신 앞의 진실’. 리움 제공

왼쪽이 신디 셔먼의 ‘부서진 인형’, 가운데가 루이스 부르주아의 ‘유방’, 오론쪽이 로버트 롱고의 ‘이 좀비들아: 신 앞의 진실’. 리움 제공

미술사학자 김홍희씨는 “리움은 다른 재벌 미술관과 달리 미술관 문화에 상당한 의미를 두고 운영했다. 그동안 여러 사건으로 주춤했는데, 재개관을 계기로 작가 발굴·지원, 해외 미술계와 네트워킹, 컬렉션 같은 옛날 역할을 다시 살리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시는 연말까지. 무료. 휴관 전에는 입장료 1만원을 받았다. 홈페이지(leeum.org)에서 사전 예약해야 한다. 2주 치 예약을 받는데, 매일 매진이다. 17일 선착순 예약하면, 31일 이후 전시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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