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돈된 구획, 확 트인 시야…도시와 건물을 잇는 ‘문지방 건축’

정다영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⑦ 조윤희 구보건축사사무소 대표, 노원구청 로비 복합문화공간

서울 노원구청 로비 복합문화공간 내부. 식물을 중심으로 벤치, 테이블을 두고, 벽체 없이 공간감을 냈다. 답답한 행정공간이 아닌 열린 문화공간을 지향했다. 텍스처 온 텍스처 제공

서울 노원구청 로비 복합문화공간 내부. 식물을 중심으로 벤치, 테이블을 두고, 벽체 없이 공간감을 냈다. 답답한 행정공간이 아닌 열린 문화공간을 지향했다. 텍스처 온 텍스처 제공

1990년 지어진 서울 노원구청
3년 전 공모전 통해 리모델링

한국 사교육 중심지 대치동 속 재래시장 같은 아파트 상가, 복사집과 스터디카페로 변한 다세대 주택가. 우리가 생각했던 기존 공간 사용법과 다른 독특한 모습이 도면 위에 생생하게 펼쳐져 있다. 구보건축은 서울역사박물관 생활연구조사 일환으로 진행된 기록 사업(2018)에서 도시건축 전문가들과 함께 대치동 일대를 실측하고 도면화했다. 피상적으로 알던 대치동을 공간 이용 행태와 형성 과정으로 살펴보는 작업이었다.

이 흥미로운 연구에서 서울 대치동은 단순히 사교육 1번지로 끝나지 않고 다른 동네처럼 몇십 년 동안 주민 삶에 맞춰 변화한 자연스러운 생태계였다. 대치동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은마아파트의 핵심 소비공간인 은마종합상가는 작은 점포들이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분화된 결과였다. 다세대 주택가를 개조한 다양한 서비스 공간들은 유명 학원가를 지원하는 인프라였다. 이 기록은 도시 조직이 입시 변화에 최적화된 하이브리드 공간으로 자리 잡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줬다.

서울 노원구청 로비 복합문화공간 외관. 텍스처 온 텍스처 제공

서울 노원구청 로비 복합문화공간 외관. 텍스처 온 텍스처 제공

기록의 힘, 도면의 가치

이 연구에서 내가 주목한 건 구보건축이 생산한 도면 자체였다. 도면은 공간 안에 들어가서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이를 만든 설계자의 눈처럼 충분한 거리를 두고 내려다보는 것이어서 현상을 객관적으로 보게 만든다. 또한 이런 도면화 작업을 통해 어떤 건물이나 공간이 복잡한 도시 속에 어떻게 안착하는지 구체적으로 파악할 수 있다. 구보건축 대표 조윤희 건축가는 기록은 “자연스러운 건축 작업의 하나”이자 “건축가의 무기인 도면을 단련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는 도면이 실제에 기반한 치수를 담고 있어 도시의 진실을 뚜렷하고 건조하게 전달한다고 설명했다.

조윤희와 현 충남대 건축학과 교수인 홍지학이 공동설립한 구보건축은 회사 운영 초반 이런 기록화 작업에 집중했다. 구보건축은 대치동 외에 서울의 마지막 판자촌으로 알려진 구룡마을의 도면 작업도 진행했다. 구룡마을 기록 작업에서는 비공식 주거 공동체 속 공공 장소의 자생적 활용 방식을 살펴볼 수 있었다. 개소한 지 얼마 안 된 젊은 건축가 사무실에 본격적으로 설계 의뢰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었다. 그때 진행했던 이 작업들은 지금 구보건축이 짓는 건축물의 자양분이 됐다.

조윤희

조윤희

도시 산책자, 건축가가 되다

구보건축에 도시를 걷고 기록하는 일은 일상의 공감대를 형성하는 일이다. 회사 이름에 조윤희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 작업의 의미가 오롯이 반영되어 있다. ‘구보’는 달리는 걸음걸이라는 뜻도 있지만 박태원이 1934년에 발표한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에서 따왔다. 근대도시 경성을 하루종일 거닐며 느낀 소회를 기록한 이 소설처럼 구보건축도 도시에서 얻는 일상 감각과 경험을 건축 작업에 반영하고자 한다.

건축가가 되기 훨씬 전부터 조윤희는 성실한 도시 산책자였다. 그는 퇴계로부터 종묘 앞까지 뻗은 세운상가에서 10년 넘게 거주했다. 아버지의 사무실이 세운상가에 있었고 가족이 상가 위 아파트에서 살았다. 건축가 김수근이 1960년대 지은 세운상가는 길이 1㎞, 폭 50m의 거대한 콘크리트 구조물로 지금까지 도시 인프라처럼 남아있다. 조윤희는 안전하지만 표준화된 놀이터가 아니라 콘크리트 옥상에서 친구들과 모험을 즐겼다. 초등학교 등굣길은 도심 산업생태계 복판에서 남산 자락을 횡단하는 것이었다. 그는 집에서 학교까지 이어지는 도시 풍경들을 살피느라 매일 왕복 두 시간씩 걷곤 했다.

서울에서 건축 공부를 마친 그의 첫 직장은 건축가 승효상이 대표로 있는 이로재건축사사무소였다. 그곳에서 3년간 일하며 건축에 대한 인문적 태도를 배웠다. 그 후 미국에서 대학원 졸업 후 하울러+윤 아키텍처(Howeler+Yoon Architecture)에서 일했다. 미국 동부 보스턴에 있는 하울러+윤 아키텍처는 고급 주택과 설치미술 작업을 주로 하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예산에 크게 구애받지 않고 고급 자재와 기술을 충분히 쓸 수 있는 건축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조윤희가 원했던 건축의 형식은 아니었다. 특수한 몇몇 사람보다 다수의 보통사람들을 위한 건축을 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그는 한국으로 돌아와 남편 홍지학과 함께 2015년에 구보건축을 열었다. “기술과 자본이 과잉된 시대에 적절함과 합리에 기반한 작업”을 목표로 내걸었다.

식물로 영역 나눈 벽 없는 로비
카페·책방·LP감상실 만들어
방문객 맞춤 문화공간 탈바꿈
‘도시의 거실’처럼 활기 충만

도시 거실이 된 노원구청

구보건축은 첫 완공작인 이화동 근린생활시설 이후 공공건축물 설계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청년 공유주택 ‘궁정동 사회주택 청운광산’(2019), 지역 커뮤니티 시설 ‘서계동 빌라집’(2020), 서울도시건축센터 라운지(2020) 등을 통해 기존 도시 조직과 조화로운 실용적 건축을 선보였다. 그중 공공건축으로 가장 규모가 큰 것이 지난 3월 말 문을 연 서울 노원구청 로비 복합문화 공간이다.

노원구청 로비 리모델링 사업은 2019년 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작업이다. 1990년에 지어진 노원구청은 지금까지 필요에 따라 덩치를 조금씩 키워온 한국의 전형적인 관공서 건물이었다. 종합계획 없이 공간들을 산만하게 덧붙이면서 정작 시민을 위한 공용 공간이 축소돼버린 상황이었다. 이런 문제들을 해소하고 방문객을 위한 중심 공간을 잡아주는 것이 노원구청 로비 작업의 핵심이었다.

이를 위해 조윤희가 몰두했던 것은 공간의 개방감 확보였다. 내부 리모델링뿐만 아니라 정문 바깥 주차장 쪽으로 증축이 진행됐다. 철골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지은 원래 건물에 기둥을 더 세우고 연장하면 쉽게 시공됐겠지만 안 그래도 좁은 로비에 면적을 차지하는 구조 기둥을 추가로 넣을 수는 없었다. 새 철골 구조물이 기존 건축물에 기둥 없이 체결되는 어려운 공법을 택했다. 답답한 행정공간 대신 열린 문화공간을 제공하기 위한 건축가의 선택이었다.

실내에는 식물을 중심으로 둘러싼 커다란 벤치와 테이블을 두었다. 벽체 없이 영역감을 확보하고 공간 흐름을 정돈했다. 카페와 책방이 들어서고 중층부에는 LP감상실이 조성됐다. 협소했던 로비가 ‘도시의 거실’처럼 여러 사람이 누리는 활기찬 라운지 공간으로 변신했다. 증축부 입면 상부는 주변과 어울리는 테라코타 타일을 붙여 단정하게 마무리했다. 사람들이 드나들고 시선이 머무는 저층부는 유리로 투명하게 마감하고 외부로 활짝 개방되는 슬라이딩 창을 사용했다. 주차장과 주출입구 경계부의 단을 높이고 정원과 보행로를 조성해 외부에서 내부로 오가는 전이 공간을 세심하게 신경썼다.

내·외부 ‘전이 공간’ 구분 심혈
주차장과 주 출입구의 경계부
단 높이고 정원·보행로 조성
색다른 일상 감각 경험하게 해

내·외부 경계의 경험 ‘문지방 건축’

구보건축은 노원구청 로비처럼 모든 작업에서 내·외부를 넘나드는 경계 공간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 조윤희는 이를 문턱, 건너가는 곳 등을 상징하는 문지방을 내세워 ‘문지방 건축’이라고 설명했다. 안타깝지만 한국에서 건물이 길가와 접촉하는 곳은 대체로 주차장이다. 아무리 멋진 카페에 들어가도 대체로 1층 창에서 보이는 것은 자동차다. 이는 도시와 건물이 만나는 경계 설정의 문제를 자극한다.

안팎이 전이되는 순간의 경험을 어떻게 풍부하게 조직하느냐에 따라 일상 감각이 달라진다. 각자 집 현관문을 열었을 때 무엇을 보고 싶은지 생각해본다면 답은 명확하다. 구보건축이 규모가 작더라도 지층에 통행할 수 있는 여유 공간을 확보하고 작은 정원을 만들거나 앉을 수 있는 장치들을 설계하는 이유다. 건축가의 이런 계획은 마치 집 앞에 화분을 놓고 가꾸는 거주자의 작지만 풍요로운 실천과 공명한다.

작은 환대의 장소들을 길가에 내어놓는 구보건축의 작업은 지난 2년 사이 그 종류와 규모가 확장됐다. 공공건축 중심이던 작업 갈래에 지금은 민간 작업들이 더 많아졌다. 조윤희는 민간건축 경험이 더 좋은 공공건축을 설계하고 싶게 만드는 자극이 된다고 말했다. 일반적으로 건축가가 명성을 얻고 작업 개수가 많아지면 공공건축보다 민간건축을 선호하는 것과 다르다. 대체로 한국에서 젊은 건축가는 공공건축 설계 공모를 통해 자기 작업을 시작한다. 불합리한 관행과 보수적인 행정 처리로 계획과 결과가 계속 어긋나는 것을 경험하면 아무리 열정적인 건축가라도 지치기 마련이다. 노원구청 로비 또한 짓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그 결과를 의도대로 지속하는 것도 쉽지 않다. 건물 준공 이후 기관은 또 각자의 방식대로 건축가가 정돈한 질서를 조금씩 흐트린다. 공간과 어울리지 않는 타이포그래피, 각종 조형물과 거치대들이 새 공간을 채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계속되는 지난한 경험 속에서도 조윤희는 건축이 가진 변화시키는 힘을 믿는다. 서울의 공공건축도 여러 제도적 진화와 건축가들의 협력을 통해 개선되고 있다. 그가 처음 설계사무소를 차렸을 때에 비해 지금 작업 환경이 얼마나 단단해졌는지 안다. 그래서 그는 도면에 그리는 선 하나가 가진 영향력에 집중한다. 건축가는 명확한 치수가 있는 물리적 실체를 만지는 사람이기에 신중하게 건물을 빚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꾸준한 마음 때문인지 그는 문화체육관광부가 수여하는 권위 있는 건축상인 ‘젊은건축가상’을 2021년에 받았다.

서울 서계동 빌라집. 텍스처 온 텍스처 제공

서울 서계동 빌라집. 텍스처 온 텍스처 제공

구보씨의 새로운 일일

소설가 구보씨가 머물렀던 경성역 대합실은 이제 ‘문화역284’가 되었다. 서울역 상부를 가로질렀던 자동차 고가도로는 보행로가 되었다. 서울역 서쪽 혹은 서울의 서쪽 경계를 뜻하는 서계동의 풍경도 몇 년 사이 크게 변했다. 서계동 복잡한 골목 한 자리에 구보건축 사무실이 있다. 전봇대집이라고 이름 붙인 사무실 건물도 동네와 원래 건물이 품은 기존 조건들을 적정하게 조율해서 알맞게 고쳐 쓴다. 이곳에도 작은 화단이 건물 경계를 둘러쌌다. 밝게 단장한 전봇대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경쾌하다.

건강한 건축, 좋은 건축이라는 게으른 수사를 구보건축의 작업에는 실컷 허용하고 싶다.

■정다영

[공감의 건축-또 다른 건축을 향해] 정돈된 구획, 확 트인 시야…도시와 건물을 잇는 ‘문지방 건축’

정다영은 건축과 도시계획을 전공했다. 건축잡지 ‘공간’ 기자를 거쳐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일한다.건국대 산업디자인학과 겸임교수, 2018베니스건축비엔날레 공동 큐레이터 등을 지냈다. ‘그림일기: 정기용 건축 아카이브’ ‘이타미 준: 바람의 조형’‘종이와 콘크리트: 한국 현대건축 운동 1987~1997’ ‘김중업 다이얼로그’ ‘올림픽 이펙트: 한국 건축과 디자인 8090’ 등 여러 전시를 기획했다.<파빌리온, 도시의 감정을 채우다> <건축, 전시, 큐레이팅>(공동)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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