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유병자·데자뷔···그리고 바다에서의 날들

김창길 기자
ⓒ랄프 깁슨

ⓒ랄프 깁슨

도로시아 랭의 문하생이었고, 로버트 프랭크의 조력자였으며, 세계적인 사진가 그룹 ‘매그넘’의 회원이었다는 등의 설명으로 ‘랄프 깁슨’의 과거 이력을 소개하는 일은 이제 필요 없게 됐다. 그의 이름을 내건 사진미술관이 지난 1일 부산에서 개관했다는 소식은 랄프 깁슨이 더 이상 다른 유명인들 후광에 기댈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을 설립한 고은문화재단은 그의 이름 앞에 ‘초현실주의 사진의 거장’이라는 타이틀을 단다.

미술관 2층 테라스에서 항구 도시의 속도감을 살피는 노익장의 눈빛은 여전했다. 다른 방식으로 세상을 보기 위해 동공의 수축과 확장을 반복하며 초점을 맞추던 청년의 치열했던 건메탈의 눈빛 말이다. 랄프 깁슨이 운을 뗐다. “내 오랜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날이다. 아시아에서 내 작품의 존재감이 좀 부족하다 싶었다. 미술관이 개관된 부산은 아시아에서 내 작품의 거점이 될 것으로 기대한다.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랄프 깁슨 사진미술관은 작가의 대표작을 포함한 1000점이 넘는 빈티즈 프린트를 소장할 예정이다.”

개관을 기념하는 사진전은 120여점의 흑백사진으로 이루어진 <블랙 3부작(The Black Trilogy)>이다. 1970년대 발표된 랄프 깁슨의 대표작으로 신비하고 에로틱하며 몽환적인 세계의 그림자들이다. 개관식 축사를 마친 동년배 사진작가 강운구와 나는 그의 사진들을 잠시 감상했다. 랄프 깁슨 못지않은 예리한 눈빛의 강운구는 이렇게 말한다. “검은색의 표현력이 참 탁월해. 근데, 그의 사진에 현실은 있을까?” 한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을 대표하는 작가의 질문은 아주 적합했으나 나는 대화를 이어가지 못했다. 강운구는 서투른 답변에 고개를 끄떡이는 소신 없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강운구의 질문이 며칠 동안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초현실주의’라는 예술 사조를 다시 살펴볼까 싶었다. 하지만 거시적인 안목으로는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란 예감이 들었다. 가령, 초현실주의 운동에 동참했던 만 레이가 으젠느 앗제의 사진을 초현실주의의 모범 답안으로 제시했지만, 작가인 앗제는 자기 사진을 초현실적이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기 때문이다. 개념을 꿰맞추지 않고 작품 자체에 찍힌 ‘초현실’을 고민해야 할 것이었다. 답을 찾기 위해 나는 랄프 깁슨의 과거 인터뷰와 사진집 서문, 그리고 그의 사진들을 살펴봤다. 디지털카메라로 찍은 컬러 사진은 제외시켰다. 이 사진들은 초현실주의보다는 추상이라는 단어가 더 어울렸기 때문이다. <블랙 3부작> 전시관 입구에 적힌 랄프 깁슨의 말은 단초가 됐다. “그림자는 단지 빛의 변형이 아니다. 나에게 그림자는 형태를 두드러지게 하며 하나의 형상이 된다.” 나는 랄프 깁슨의 그림자에 주목하기로 결심했다. 누구보다 깊은 명암을 표현하는 랄프 깁슨의 사진술은 삶의 어두운 영역을 이해하게 된 이후 얻은 선물이었다.

랄프 깁슨의 <자기 폭로(Self Exposure)> 표지 사진 ⓒ Ralph Gibson

랄프 깁슨의 <자기 폭로(Self Exposure)> 표지 사진 ⓒ Ralph Gibson

열일곱 살의 랄프 깁슨은 소설 <모비딕>의 화자 ‘이슈마엘’처럼 바다로 추방됐다. 해군으로 바다에서 보낸 3년을 그는 “아버지에 대한 저항이었다”며 자서전 <자기 폭로(Self Exposure)>에 적는다. 알코올 중독에 빠진 아버지는 어머니를 괴롭혔다. 이혼한 어머니는 아파트를 팔고 미용실을 차렸다. 창업은 성공하지 못했다. 어머니의 불행은 계속됐다. 그녀는 화재로 세상을 떠났다. 선상에서 맞는 매일 아침, 랄프 깁슨은 아득히 먼 곳에 시선을 던졌다. 초점은 수평선에 멈추었다. 랄프 깁슨은 T S 엘리엇의 시집 <사중주 네 편>을 펼쳤다.

“지금의 시간과 지난 시간은/ 둘 다 아마도 미래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 그리고 미래의 시간은 과거의 시간에 포함돼 있네./ 모든 시간이 영원히 존재한다면/ 모든 시간은 구원받지 못하리./ 그랬을 법한 것은 추상/ 영원한 가능성으로 남아/ 단지 추측의 세계 안에/ 그랬을 법함과 그러했음/ 한 지점을 가리켜, 늘 존재하는/ 발소리들은 추억 속에 메아리치네./ 우리가 택하지 않은 통로 아래/ 우리가 절대 열지 않은 문을 향해/ 장미 정원으로. 내 말은 메이리치고/ 그리하여, 당신의 마음속에서.”

엘리엇의 시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랄프 깁슨은 시에 빠져들었다. 그는 시를 읽고 또 읽는다. 철학자 사르트르가 말한 “충만한 애매모호성”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예술은 이해하지 못한 채로 이해하는 과정일 수도 있겠다 싶었다. 사진을 찍게 된 사연도 그런 것 같다. 열세 살부터 기타줄을 뜯는 데 능란했던 그의 손가락이 풀 메탈 재킷의 카메라를 움켜쥐었다. 랄프 깁슨은 “내가 사진을 택한 것이 아니라 사진이 나를 택했다”고 기억한다. 엘리엇의 시를 빌려 말하자면 랄프 깁슨은 자기가 “택하지 않은 통로 아래”에 카메라가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바다에서 표류했던 삶에 마침표를 찍고 랄프 깁슨은 고향 캘리포니아를 떠나 뉴욕으로 향한다. 누구도 “절대 열지 않은 문”을 열기 위해서였다. 도로시아 랭은 충고했다. 자기 사진의 ‘출발 지점(the point of departure)’을 찾으라고. 그는 그녀처럼 보도사진을 찍는 데 관심이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주관적인 다큐멘터리 사진을 보여준 로버트 프랭크는 랄프 깁슨의 출발 지점을 찾는 조력자가 됐다. 그는 로버트 프랭크의 스타일을 극단으로 밀고 나가 ‘다큐멘터리’를 숫제 제거해 버렸다. 이제 그에게 남겨진 피사체는 ‘주관’밖에 없었다. 랄프 깁슨은 거대한 세상이 아닌 개인적인 세계로 렌즈를 돌렸다.

ⓒ Ralph Gibson

ⓒ Ralph Gibson

스물아홉의 랄프 깁슨은 뉴욕 6번가를 걷고 있었다. 그는 화염에 휩싸인 미용실을 우연히 목격한다. 깁슨의 손은 자석에 끌리듯 카메라를 움켜쥔다. 찰칵. 셔터가 열리는 그 짧은 순간, 억눌렸던 내면의 모든 감정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화염에 휩싸여 세상을 떠난 어머니! 당시의 랄프 깁슨은 애도할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메마른 상태였다. 하지만 자기 눈앞에서 불타오르는 미용실의 불꽃은 그의 무의식을 열어젖혔다. 랄프 깁슨은 셔터를 누르며 눈물을 터뜨렸다. 그는 다짐했다. ‘사진으로 내 영혼을 팔지 않겠어. 이제 내 영혼을 찾기 위한 사진을 찍어야겠어.’

랄프 깁슨의 청회색 눈빛은 또렷해졌다. 그의 피사체는 사건이 아니라 자기 내면의 세계였다. 꿈, 트라우마, 욕망, 광기, 환상으로 들어찬 무의식의 세계. 이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뉴욕의 거리에서 찍은 화염에 휩싸인 미용실 사진은 사건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감정과 생각이 담긴 사진이었다. 사진 속의 시간은 중첩된다. 어머니의 죽음은 과거였다. 사진을 찍는 순간은 현재다. 그리고 그 사진을 보게 되는 시점은 미래이다. “지금의 시간과 지난 시간은/ 둘 다 아마도 미래의 시간 속에 존재”한다는 엘리엇의 시는 사진의 문법을 따르는 듯하다.

엘리엇뿐만 아니라 음악, 영화, 그리고 프랑스의 문화는 랄프 깁슨에게 사진적인 영감을 준다. 그는 소설가 마르그리트 뒤라스와 알랭 로브그리예의 ‘누보로망’ 형식에 빠져든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은 사진가만큼 예리한 카메라아이로 사물을 묘사한다. 이야기의 전개는 고전적인 시간의 법칙을 따르지 않는다. 알랭 로브그리예의 <질투>는 아내를 바라보는 관음적인 시선이 테라스에 드리운 그림자의 길이에 따라 반복될 뿐이다.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의 논리나 시간의 법칙이 아니라 어떤 대상에 대한 감각의 수축과 이완이다.

<블랙 3부작> 및 <몽유병자> 중에서. ⓒ Ralph Gibson

<블랙 3부작> 및 <몽유병자> 중에서. ⓒ Ralph Gibson

1970년 랄프 깁슨은 작품을 세상에 알리기 위한 출판사 ‘러스트럼’을 차리고 그의 첫 번째 사진집 <몽유병자(The Somnambulist)>를 내놓는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내밀고 있는 누군가의 검은 손을 찍은, 조금은 섬뜩한 느낌의 사진이 표지로 선택된 사진집이다. 사진 속의 시커먼 손은 문을 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닫고 있는 것일까? 그도 아니면 이미 열려 있는 문틈으로 소리 없이 내미는 악마의 손일까? 사진은 책 속에 다시 등장한다. 책장을 펼치면 오른쪽 페이지에 문틈으로 내민 검은 손이, 왼쪽 페이지에는 소파에 앉은 한 남성의 손을 찍은 사진이 있다. 이 두 사진에 찍힌 손은 같은 손일까? 그리고 같은 공간일까? 그림자의 각도는 비슷한 시간에 찍혔다는 점을 암시하며 미궁 속에 빠져들게 한다.

<블랙 3부작> 및 <데자뷔> 중에서. ⓒ Ralph Gibson

<블랙 3부작> 및 <데자뷔> 중에서. ⓒ Ralph Gibson

2년 후 출판된 <데자뷔(Deja Vu)>도 전작과 비슷한 구성으로 편집됐다. 사진집을 보는 이들은 대게 오른쪽 페이지를 먼저 본 후에 왼쪽 사진을 보게 된다. 오른쪽 페이지에는 어느 바닷가에 있는 사람의 상체 일부를 찍은 사진이 있다. 왼쪽은 어느 산에서 리볼버 권총의 방아쇠를 당기고 있는 손을 찍은 장면이다. 사진의 장소가 다르므로 두 인물이 동일인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두 눈은 펼쳐진 책 속의 두 사진을 한 장면으로 받아들인다. 바다에 있는 남자는 산으로 팔을 뻗어 총을 겨눈다. 누구를 죽일 것인가? 왼쪽 책장을 넘기면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까? 랄프 깁슨은 엘리엇의 시처럼 충만한 애매모호함으로 사진집을 구성한다. “단지 추측의 세계 안에/ 그랬을 법함과 그러했음.”

<바다에서의 날들(Days at Sea)>은 랄프 깁슨의 바다에 대한 욕망을 담아 1974년 제작된 사진집이다. 그는 <몽유병자>와 <데자뷔>, 그리고 <바다에서의 날들>을 간추려 <블랙 3부작>으로 재구성했다. 랄프 깁슨의 사진집은 사진계에 파문을 일으켰다. 그는 누보로망 작가들처럼 시간이나 공간의 순차적인 흐름에 따라 사진을 펼쳐놓지 않았다. 랄프 깁슨은 관람객들이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상태로 남겨진 사진의 흐름 속에서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나가기를 원했다. 이것은 그가 즐기는 기타 연주와 비슷한 방식이다. 기타의 코드는 여섯 가닥의 기타줄에서 퉁겨지는 소리들의 종합이다. 코드는 지판을 누르는 손가락 위치에 따라 화음이 달라진다. 가령 ‘C코드’는 ‘Cm’ ‘C7’ ‘CM7’ ‘Cm7’ 등으로 변형되고 확장된다. 우리는 랄프 깁슨이 제공하는 기본 코드를 바탕으로 자기 내면의 감정들을 연주하게 된다.

개관식 다음날 열린 아티스트 토크에서 랄프 깁슨은 검은색 전자기타를 손에 들었다. 카메라 셔터를 누르던 그의 오른손이 기타줄을 퉁기고, 렌즈의 초점 링을 돌리던 왼손이 코드를 잡자 사이키델릭한 선율이 미술관에서 메아리친다. 그의 기타 연주와 사진의 메아리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풀 메탈 재킷을 걸치고 카메라를 든 랄프 깁슨의 손이 아직은 전혀 힘겨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랄프 깁슨 / 고은문화재단 제공

랄프 깁슨 / 고은문화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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