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격자로 이뤄진 ‘완벽한 아름다움’···세계 거장 데려온 솔올미술관 ‘마지막 전시’ 될까

강릉 | 이영경 기자
아그네스 마틴,  ‘아기들이 오는 곳’(순수한 사랑 시리즈), 1999,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52.4 x 152.4 cm, 디아파운데이션.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아그네스 마틴, ‘아기들이 오는 곳’(순수한 사랑 시리즈), 1999,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52.4 x 152.4 cm, 디아파운데이션.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아그네스 마틴,  ‘무제 #9’, 1990,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82.6 x 182.6 cm, 휘트니 미술관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아그네스 마틴, ‘무제 #9’, 1990,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82.6 x 182.6 cm, 휘트니 미술관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반복적으로 그려 넣은 격자무늬, 캔버스에 그려진 수평선들 사이에 채워넣은 옅고 묽은 물감들.

아그네스 마틴(1912~2004)의 작품을 한 점만 놓고 봤을 땐 그 진가를 알아보기 힘들다. 단조롭거나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심지어 줄노트나 격자무늬 노트를 커다란 캔버스에 확대해 놓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마틴의 작품을 모아놓고 보면 다르다. 연필로 옅게 그은 선들, 서로 다른 격자와 선의 간격, 농담을 달리해 칠한 반투명 색들이 변주되고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바라보다 보면 그가 만들어낸 순수한 추상의 세계로 빠져들게 된다. 마틴의 작품은 꽉 찬 세계가 아니라 텅 비어 있어, 보는 이를 그림 속으로 초대한다.

“내 그림에는 사물도 공간도 선도 아무것도 없다. 아무런 형태도 없다. 내 그림들은 빛이고, 가벼움이고, 합쳐지는 것, 무정형성에 관한 것이어서 형태를 무너뜨린다. …바다를 보려고 텅 빈 해변을 가로지르듯 시야 속으로 그저 직행해 들어가야 할 필요성을 받아들이는 것이다.”(아그네스 마틴)

미니멀한 백색 건축물에 장식이랄 것 없는 단순한 줄과 선, 연하디 연한 색채로 이뤄진 아그네스 마틴의 그림은 맞춤한 듯 어울렸다. 통창으로 햇빛이 눈부시게 비치는 복도를 뒤로하고 전시실로 들어오면 하얀 전시실 벽에 마틴의 그림들이 걸려있다.

솔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의 2전시실에 마틴의 회색 모고크롬 회회 시리즈가 전시돼 있다. 솔올미술관 제공

솔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의 2전시실에 마틴의 회색 모고크롬 회회 시리즈가 전시돼 있다. 솔올미술관 제공

강원도 강릉시 솔올미술관에서 ‘아그네스 마틴 : 완벽의 순간들’ 전시가 열린다. 지난 2월 개관한 솔올미술관은 첫 전시로 ‘공간주의’를 창시한 이탈리아 거장 루치오 폰타나의 전시를 선보인데 이어 두 번째 전시로 미국 추상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아그네스 마틴의 전시를 선보인다.

캐나다 출생의 미국 여성 미술가 마틴은 1950년대 이후 미국 미술을 대표하는 작가로 꼽힌다. 한국에서 처음 열리는 마틴의 미술관 전시인 데다, 영국의 현대미술관 테이트 모던 명예 관장이자 올해 이화여대 조형예술대 석좌교수로 초빙된 프랜시스 모리스가 직접 큐레이팅을 맡아 기대를 모았다. 마틴의 주요 작품 54점이 뉴욕의 휘트니 미술관, 일본의 오사카 국립국제미술관, 나고야시 미술관, 리움미술관을 비롯해 해외 소장자 협력을 통해 전시된다.

지난 3일 강원도 강릉시 솔올미술관에서 열린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기자간담회에서 전시기획을 맡은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 모던 명예 관장이 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릉|이영경 기자

지난 3일 강원도 강릉시 솔올미술관에서 열린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기자간담회에서 전시기획을 맡은 프랜시스 모리스 테이트 모던 명예 관장이 전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강릉|이영경 기자

“2년도 훨씬 전 김석모 솔올미술관장으로부터 한국의 한 도시에 새로 지어질 미술관에서 열릴 전시 초대를 받았습니다. 새로운 건축물의 계획을 공유받았을 때, 미술관이 마틴의 작품과 조화를 이룰 것을 즉시 확신했습니다.”

지난 3일 솔올미술관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모리스는 “아그네스 마틴이란 예술가를 단순히 조망하는 전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전시 제목처럼 마틴의 ‘핵심적 순간들, 완벽한 순간들’에 주목해 본질에 다가가려 노력했다”고 말했다.

전시는 20년 동안 작가를 사로잡았던 회색 모노크롬 작품 시리즈와 마틴이 말년에 양로원에서 제작한 ‘순수한 사랑’ 시리즈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아그네스 마틴,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아그네스 마틴, ‘나무’, 1964, 캔버스에 아크릴, 연필, 190.5 x 190.5 cm, 리움미술관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아그네스 마틴, ‘어느 맑은 날’, 1973, 일본 종이에 실크스크린 프린트 포트폴리오 30점, 30.5 x 30.5 cm (각), 페이스 갤러리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아그네스 마틴, ‘어느 맑은 날’, 1973, 일본 종이에 실크스크린 프린트 포트폴리오 30점, 30.5 x 30.5 cm (각), 페이스 갤러리 (C) Estate of Agnes Martin Artists Rights Society (ARS)

1955년 마틴이 구상회화를 벗어나기 시작해 원형,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기하학적 언어와 차분한 색상으로 옮겨가기 시작해 선과 격자로 이뤄진 완전한 추상세계로 옮겨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마틴의 변화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나무’(1964)도 이번 전시에서 볼 수 있다. 리움미술관 소장품인 ‘나무’는 대형 캔버스를 오로지 직사각 격자로만 채워넣었다. 마틴은 ‘나무’를 그리게 된 순간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처음 그리드(격자)를 만들 때, 나는 우연히 나무의 순수함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 그리드가 마음속에 떠올랐다. 내게는 이것이 순수함을 재현하는 것 같았고, 지금도 그렇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것이 나의 비전이라고 생각했다.”

강릉 솔올미술관 2전시실에 설치된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에 선보인 마틴의 회색 모노크롬 회화들. 강릉|이영경 기자

강릉 솔올미술관 2전시실에 설치된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 에 선보인 마틴의 회색 모노크롬 회화들. 강릉|이영경 기자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에 전시된 ‘순수한 사랑’ 시리즈. 솔올미술관 제공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에 전시된 ‘순수한 사랑’ 시리즈. 솔올미술관 제공

2전시실 한 공간을 가득 채운 회색 모노크롬 회화 8점은 관람객들이 발길을 멈추고 그저 바라보게 만든다. 가로선, 격자, 명도를 달리한 회색으로만 이뤄진 그림들은 형태, 색조, 질감의 변주를 통해 채움 대신 비움으로 자신을 표현하려고 했던 마틴의 작품세계를 잘 보여준다. 관람객은 이곳에서 마틴이 그림을 그리는 행위를 통해 얻고자 했던 명상적 상태를 보는 행위를 통해서 몸으로 경험할 수 있다.

마틴이 1999년 양로원에서 그린 8점의 ‘순수한 사랑’ 시리즈로 채워넣은 3전시실은 또다른 느낌을 준다. 연필로 그어진 수평선 사이를 연노랑, 연하늘, 연분홍의 파스텔톤 색채로 칠한 그림들이 부드럽고 따스해 순수한 기쁨을 떠올리게 한다. 영국의 비평가 올리비아 랭은 “모래와 살구, 아침 하늘빛을 닮은 색층”이라고 말했다. 아주 묽게 희색해 투명에 가까운 색상들을 마틴은 ‘원색’이라고 불렀다.

세미나실에선 마틴을 다룬 매리 렌스의 다큐멘터리 영화 <세상을 등지고>를 볼 수 있다. 2002년 마틴의 작업실을 찾아 인터뷰한 영상을 통해 마틴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에서 볼 수 있는 아그네스 마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상을 등지고> 에서 나오는 아그네스 마틴. 강릉|이영경 기자

강릉 솔올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아그네스 마틴: 완벽의 순간들’에서 볼 수 있는 아그네스 마틴에 대한 다큐멘터리 영화 <세상을 등지고> 에서 나오는 아그네스 마틴. 강릉|이영경 기자

사과같이 빨간 볼, 어린아이 같은 짧은 머리카락을 한 영화 속 마틴은 자신의 그림과 같이 순수하고 꾸밈없어 보이지만, 실제 마틴의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마틴은 어린 시절 지나치게 엄격한 어머니의 통제 속에 심리적 어려움을 겪었다. 미국 컬럼비아 대학에서 선불교와 도교를 접하면서 숨통을 트여줄 해방구를 보았다. 마틴의 작품세계는 이런 사상적 배경 속에서 형성됐다. 마틴은 ‘목소리’라 부르는 환청을 듣기도 했으며, 조현병을 앓기도 했다. 마틴에 삶에 대해 알고 나면 단순하고 순수한 아름다움으로 가득한 마틴의 작품이 더 깊게 다가온다.

정상화, ‘작품 12-11’, 1973, 캔버스에 아크릴, 227.3 x 182 cm (C) 정상화, 이미지 갤러리현대

정상화, ‘작품 12-11’, 1973, 캔버스에 아크릴, 227.3 x 182 cm (C) 정상화, 이미지 갤러리현대

“세계미술과 한국미술을 연결하는 미술관”을 표방한 솔올미술관은 지난 전시에서 폰타나와 한국의 곽인식 전시를 병행해 선보인데 이어 마틴의 전시와 함께 한국 단색조 추상화가 정상화의 전시를 선보인다. 정상화의 ‘백색추상’은 캔버스에 백색 고령토를 덮어 바른 뒤 가로세로로 접어 금 간 사이를 뜯어 물감을 메우는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 전시를 기획한 모리스는 “두 작가는 치밀한 계획성과 즉흥성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면에서 닮았다”며 “마틴과 정상화의 작품이 대화를 만든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두 작가의 작품을 잘 이해하고 진가를 발견하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고 말했다.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전경. ‘백색 건축’의 대가로 불리는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가 건축했다. 건물 중앙 조명은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으로 지금은 철거됐다. 솔올미술관 제공

강원도 강릉 솔올미술관 전경. ‘백색 건축’의 대가로 불리는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가 건축했다. 건물 중앙 조명은 루치오 폰타나의 작품으로 지금은 철거됐다. 솔올미술관 제공

지난 2월 개관한 솔올미술관은 ‘백색 건축의 거장’ 리처드 마이어의 건축 철학을 계승한 마이어 파트너스의 건축과 이탈리아 현대미술 거장 폰타나의 전시로 화제를 모았다. 3개월 만에 다시 찾은 솔올미술관은 로비 천장에서 건축의 일부인 듯 존재감을 발했던 폰타나의 백색 네온 작품 ‘제9회 밀라노 트리엔날레를 위한 네온 구조’이 철거되고 일반 조명이 설치돼 있었다.

한국근현대미술연구재단이 위탁 운영을 맡은 솔올미술관은 오는 8월25일 전시가 막을 내리면 강릉시에 기부체납돼 시립미술관으로 운영될 계획이다. 김석모 관장은 “이번 전시로 저희의 임무는 끝이 난다. 두 번째 전시이자 마지막 전시”라며 향후 운영 계획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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