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재단미술상 김희천 신작 ‘스터디’
고교 레슬링부에서 사라지는 학생들
저화질 영상·불쾌한 사운드로 공포감 극대화
기술에 의해 매끄럽게 포착된 ‘나’를 벗어나
‘공포’가 현대인 실존적 위기 다룰 도구
대회를 앞두고 고등학교 레슬링부 선수들이 한명씩 사라진다. 코치인 주인공에게 어느날 실종된 학생의 어머니가 찾아오지만 주인공은 그 학생을 기억조차 못한다. 홀로 남아 학교를 순찰하던 주인공은 텅 빈 레슬링 연습실에서 누군가 연습하는 듯한 소리를 듣는다. 훈련 장면을 녹화한 영상 속엔 실종된 학생과 스파링한 선수들이 허공에 대고 섀도우 레슬링을 하는 기이한 장면만 찍혀 있다.
이번 여름 새로 개봉한 공포영화 줄거리가 아니다. 현대미술계에서 주목받는 작가로 떠오른 김희천(35)의 신작 ‘스터디(Studies)’의 내용이다. 지난해 제20회 에르메스 재단 미술상 수상작가로 선정된 김희천이 신작 ‘스터디’를 서울 강남구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선보이고 있다.
여름과 공포영화는 잘 어울리는 한 쌍이지만, 김희천과 공포영화는 의외의 조합이다. 아버지의 갑작스런 죽음 이후 아버지가 차고 있던 시계 속 GPS와 심박수 데이터로 만든 영상 ‘바벨’(2015)로 주목받은 김희천은 게임 엔진, 가상현실(VR), 페이스 스와프(얼굴 바꾸기) 등 최신 기술과 디지털 미디어를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다. 매끄러운 기술의 세계 속에서 작업을 해오던 그가 이번에는 저화질의 홈비디오 카메라를 들고 공포영화라는 형식에 도전했다.
“평소 공포영화를 굉장히 좋아해요. 친구들과 ‘왜 요즘 공포영화는 무섭지 않을까’라는 이야기를 많이 나눴어요. 많은 이들이 ‘화질이 너무 좋아서’라는 이유에 공감했어요. 설명할 수 없는 불가사의를 시각화하는 게 공포영화인데, 매끈하고 선명한 이미지로는 공포감이 잘 느껴지지 않는거죠. 기술은 우리의 취향, 삶의 외곽선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매끄럽게 포착하죠. 이를 통해 삶의 경계를 제안함과 동시에 제한합니다. 이런 상황에 무기력·답답함을 느꼈고, 이것들이 공포를 대체하고 있는 건 아닐까 생각했어요. ‘공포’가 실존적 위기를 다룰 수 있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지난 25일 아뜰리에 에르메스에서 만난 김희천이 말했다. 두 채널 영상으로 이뤄진 40여분의 작품은 전체가 실사영화로 촬영됐다. 컴퓨터그래픽(CG)은 배제됐다. 지난해 게임 엔진을 활용한 작품을 선보였던 김희천은 “3D 이미지는 데이터값에 의해 결과물이 확정되는 결정론적이고 안전한 방식이다. 이런 방식으로 불가사의한 공포를 표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스터디’는 무서운가? 결론부터 말하자면 ‘무섭다’. 학교에서 실종되는 학생들, 상당부분 암전 상태에서 시각을 제한하고 대화와 소리로만 진행되는 이야기, 7개의 사운드 스피커를 통해 불쾌하고 기묘한 소리를 극대화해 전달하는 등 공포영화의 장르적 클리셰를 적절히 활용한다.
영화의 기괴함과 공포는 학생들의 훈련 장면을 촬영한 영상에서 극대화된다. 상대방이 지워진 영상 속에서 홀로 섀도우 레슬링을 하는 선수들의 신체는 기묘하게 비틀리고 흐려지고 왜곡된다.
이번에 김희천은 뭔가를 더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빼기 위해서 ‘첨단 기술’을 사용했는데, 두 사람이 한몸으로 엉켜 레슬링을 하는 영상에서 한 사람의 신체만을 지우기 위해서다. 결과물의 완성도로 평가하자면 ‘실패’에 가깝다. 한몸처럼 엉킨 두 신체에서 하나만 매끄럽게 도려내는 건 불가능했고, 외곽선과 배경이 흐려지고 뒤틀리게 표현됐다. 기술의 불완전성이 관객에게 공포감을 선사한다면, 김희천은 여기서 ‘희망’을 느꼈다. 그는 “기술이 완벽하지 않아 생기는 틈에서 아직 뭔가 시도해볼 게 남았다는 위안을 얻었다”고 말한다.
영화 속에서 학생들의 실종이 훈련 영상이라는 ‘데이터’에서 삭제되는 방식으로 표현되는 점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인터넷 상의 온갖 데이터를 통해 개인이 표현되고 포착되는 현대사회에서 데이터 삭제는 존재의 상실과 맞닿아있다.
하필 왜 레슬링일까. 김희천은 “생활 체육으로 레슬링을 하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접근했다”고 말했다. “레슬링은 혼자서 할 수 없는 운동이에요. 여러 사람들과 몸을 경험해봐야 잘 할 수 있고, 상대방에 따라서 나의 레슬링 방식도 달라질 수밖에 없어요. 그 지점에서 기술이 보장하는 너무 구체적이고 연속된 ‘나’에서 벗어날 수 있는 해방감을 느꼈어요.”
김희천이 가장 좋아하는 공포영화는? 일본 영화 <링>을 꼽는다. 학창시절인 2000년대 초반, 불법 다운로드 받아 본 <주온>도 저화질의 뭉개진 영상이 너무나 무섭게 느껴졌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스터디> 속엔 그가 참고한 공포 영화 속 유명 장면을 연상시키는 장면들도 숨어 있다. 전시는 10월6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