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에서도 ‘꽃’을 그린 천경자···여성 화가들이 넘어온 ‘격변의 시대’

이영경 기자

천경자 화백 탄생 100주년

서울시립미술관서 기념전 열려

여성 한국화가 23인의 삶·예술 다룬 기획전

천경자 기행화 모은 상설전도 새로 꾸려

천경자 ‘꽃과 병사와 포성’(197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천경자 ‘꽃과 병사와 포성’(197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꽃과 여인, 이국적이고 환상적인 풍경 속 생명력을 그려냈던 천경자 화백(1924~2015)은 전쟁의 포탄 속에서도 피어나는 꽃들의 아름다움과 생명력을 보았다.

1972년 베트남전쟁 당시 정부는 천경자를 비롯해 김기창, 박서보 등 화가 10명을 베트남 전선으로 20일간 보내 한국군의 활약을 기록하게 한다. 10명의 ‘종군화가’ 가운데 유일한 여성이었던 천경자는 전쟁의 참혹함 대신 우거진 밀림, 열대꽃의 아름다움을 그려냈다. 284×185㎝ 대작 ‘꽃과 병사와 포성’엔 병사와 전차들 사이로 꽃이 뿜어낸 듯한 붉은 연기가 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고통스럽고 참혹한 삶 속에서도 예술을 통해 환상과 아름다움을 좇았던 천경자의 그림답다.

그동안 전쟁기념관 수장고에 있던 천경자의 ‘꽃과 병사와 포성’이 대중에게 처음으로 공개된다. 서울 중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리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 기념 기획전 ‘격변의 시대, 여성 삶 예술’에서다. 천경자와 함께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민주화 등 격변의 시대를 살아온 여성 한국화가 23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엮은 전시다. 올해는 천경자 탄생 100주년이지만, 단독 회고전 대신 여성 화가들과 함께하는 기획전 형식으로 전시가 꾸려졌다. 2016년 1주기를 맞아 천경자가 생전에 서울시에 기증한 93점의 작품 등 100여점을 선보이는 대규모 회고전을 한지 오래 지나지 않아서다.

전시는 일제시대와 해방 이후 근현대를 헤쳐온 여성 한국화가들이 왜색 탈피, 민족의식 반영 등 동양화단에 공통적으로 부과된 과제를 수행하면서도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하는 과정, 가사와 양육의 부담 등 여성에게 주어진 이중고 속에서 포기하지 않고 붓질을 이어나간 모습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조선미술전람회(조선미전), 해방 이후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를 통해 화가로 이름을 알리고, 시대와 길항하며 자신의 작품세계를 발전시켜나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장상의 ‘다시래기’(1988).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장상의 ‘다시래기’(1988).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숙자 ‘캠퍼스 훈련생’(198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이숙자 ‘캠퍼스 훈련생’(198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1전시실 ‘격변의 시대’는 35마리의 뱀이 얽힌 강렬한 그림 ‘생태’(1952)로 시작한다. 천경자가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여동생을 결핵으로 잃는 등 삶의 고난이 극에 달했을 때 뱀을 보고 생의 충동을 느껴 그린 작품이다. 독재정권 치하 가슴의 한을 춤으로 풀어낸 장상의의 ‘다시래기’(1988), 못 쓰는 한지로 종이죽을 만들어 4·19혁명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는 조각을 만든 문은희의 작품, 군사독재 시기 재개된 교련수업을 주제로 한 이숙자의 ‘캠퍼스의 훈련생’(1982) 등을 볼 수 있다.

2, 3 전시장에선 조선미전과 국전에서 입상한 작가들의 작품과 연보 등을 볼 수 있다. 천경자를 비롯 박래현, 심경자, 이숙자 등의 입상작을 선보인다. 한희진 학예연구사는 “각 작가의 연보와 작품 변화에 대해 상세하게 정리해 미술사적으로도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국전은 인맥에 얽힌 심사로 편파성 논란이 일기도 했는데, 천경자는 ‘쿨한 심사위원’이었다. 당시 한 평론가는 “인맥에는 초연한 유영국 장욱진 천경자 등의 활동이 더 두드러지고 좋은 평을 듣고 있다”고 말한 기록을 볼 수 있다.

5전시실에 이르러 자신만의 사실적 화풍에서 벗어나 독자적 작품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의 작품을 엿볼 수 있다. 천경자가 ‘생태’ 이후 17년 만에 뱀을 주제로 그린 그림이자 한국동양화유럽순회전에 출품돼 호평받은 ‘사군도’(1969)도 만날 수 있다. 강렬한 색채의 방울뱀의 꿈틀대는 듯한 움직임이 느껴지는 작품이다. 불교적 주제를 강한 색조 대비로 표현한 류민자, 탁본으로 독자적 작품 세계를 이룬 심경자의 ‘가르마’, 문은희의 수묵 누드화 등을 볼 수 있다.

천경자 ‘사군도’(1969)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천경자 ‘사군도’(1969)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류민자 ‘만남’(200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류민자 ‘만남’(2002)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세간의 편견 속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생계와 작업을 이어갔던 천경자와 같이 당시 여성 화가들은 어려움 속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생계와 육아 때문에 이들의 작가로서의 경력은 매끄럽게 연결되지 못하고 자주 중단된다. 하태임 작가의 어머니이자 하인두 작가의 아내인 류민자 작가는 남편이 보안사범으로 몰리자 세 아이를 키우기 위해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이경자 작가는 남편의 반대 때문에 아이들과 남편이 없을 때만 그림을 그려야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10년 만에 새롭게 기획한 천경자 상설전 ‘영혼을 울리는 바람을 향하여’도 함께 선보인다. 천경자의 기행 회화에 주목한 전시로 30점 가운데 19점은 오랜 기간 대중에게 전시되지 않았던 작품들이다. 기획전은 11월17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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