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지 않는 물감’으로 AI가 꿈꾼 자연···‘결과’보다 과정이 흥미로워

이영경 기자

레픽 아나돌 ‘대지의 메아리’ 전시

5억개 자연 이미지, 400시간 사운드 데이터

AI가 학습해 만든 변화하고 움직이는 작품

이전 작품과 ‘유사’ 지적에 “AI의 화풍”

데이터 공개·재생에너지 사용 “윤리적 제작”

서울 종로구 푸투라 서울에서 열린 레픽 아나돌의 전시 ‘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아카이브’  전시 전경. 연합뉴스

서울 종로구 푸투라 서울에서 열린 레픽 아나돌의 전시 ‘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아카이브’ 전시 전경. 연합뉴스

대형 스크린에서 분출하고 쏟아져내리는 듯한 총천연색 입자와 물감의 대향연, 인공지능(AI)을 이용한 미디어 아티스트 레픽 아나돌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다. AI가 예술의 새로운 도구로 자리잡고 있는 가운데, 아나돌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스케일이 큰 작품들을 선보이기 때문이다. 아나돌의 AI가 생성한 이미지가 2002년 뉴욕현대미술관(MoMA) 1층 벽면 전체를 가득 채운 것은 현대미술계에서 상징적인 장면이 됐다.

아나돌이 “마르지 않는 물감”이라고 말하는 AI를 이용해 자연에 대한 대규모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작품을 선보인다. 서울 종로구 푸투라 서울에서 열리고 있는 ‘대지의 메아리: 살아있는 아카이브’에서다. 런던 서펜타인에서 올해 초 공개돼 5주간 7만여 명이 관람한 전시를 서울로 가져왔다.

“기계가 자연을 꿈꿀 때 어떤 모습일까?”

전시는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관련된 숫자가 어마어마하다. 5억개가 넘는 이미지, 400시간에 달하는 녹음된 사운드, 50만개의 향기 데이터가 사용됐다. 고해상도 카메라와 라이다(LiDAR·3차원 레이저 측정 시스템)들 들고 아마존 우림에서 한 달 간 머물면서 수집한 데이터도 포함됐다. 구글 클라우드와 엔비디아의 지원을 받아 ‘대규모 자연 모델’(Large Nature Model·LNM)이라 이름붙인 AI를 개발했다.

미디어 아트 작가 레픽 아나돌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제작에 사용된 AI 모델인 LNM 제작 과정을 시각화한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미디어 아트 작가 레픽 아나돌이 지난달 27일 서울 종로구 푸투라 서울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작품 제작에 사용된 AI 모델인 LNM 제작 과정을 시각화한 영상을 소개하고 있다. 연합뉴스

1·2전시관에서는 작품의 제작 과정을 시각화해 보여준다. 자연에 특화된 생성형 AI모델인 LNM 개발과정, 열대 우림의 식물·동물·균류 등 5억개의 원데이터 이미지가 보여진다.

3관에선 아마존에서 한달 간 체류하며 수집한 데이터를 기반으로 한 물과 관련된 이미지를 만날 수 있다. 천장에 걸치된 대형 스크린에서 푸른색 물감들이 아래로 쏟아질 듯 움직이고, 그 이미지는 바닥의 거울에 반영된다. 나무 수액 소리를 기반으로 한 음악이 배경에 흐른다. 아나돌은 “아마존에서 선주민과 함께 생활하며 왜 물이 중요한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물과 함께 명상하는 공간이 되면 좋겠다”고 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인 4관에선 10.8m 층고를 가득 채운 세 개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본격적으로 ‘AI가 꿈꾸는 자연’을 만날 수 있다. 1억개의 산호 이미지, 수백만 장의 식물 이미지, 4억개의 동물 이미지, 1억550만개의 풍경 이미지 등을 기반으로 AI가 생성한 ‘기계 환각’이 세 개의 스크린을 통해 끊임없이 변화하며 역동적으로 움직인다. 물감과 입자들이 화면 밖으로 뛰쳐나올 듯 솟구치며 일렁이다 동물과 산호, 꽃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변하며 관람객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50만개 향 데이터를 기반으로 AI가 조향한 풀과 숲을 연상시키는 향기가 공간을 채운다.

레픽 아나돌이 열대우림에서 수집한 물과 관련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AI가 생성한 이미지가 천장의 대형 스크린에서 보여지고 있다. ⓒ김동준·푸투라 서울 제공

레픽 아나돌이 열대우림에서 수집한 물과 관련된 이미지를 바탕으로 AI가 생성한 이미지가 천장의 대형 스크린에서 보여지고 있다. ⓒ김동준·푸투라 서울 제공

‘기계 환각- LNM: 식물’은 수백만 장의 식물 이미지(오른쪽)을 학습한 AI가 내놓는 이미지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제공

‘기계 환각- LNM: 식물’은 수백만 장의 식물 이미지(오른쪽)을 학습한 AI가 내놓는 이미지다. 레픽 아나돌 스튜디오 제공

아나돌은 그동안 뉴욕현대미술관(MoMA)의 소장품 13만8000개를 기반으로 만든 ‘Unsupervised’(2022),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100년 동안의 공연, 음악 등을 기반으로 한 ‘WDCH Dreams’(2018), 서울 여의도 63빌딩에서 한국 전통음악, K팝 뮤직비디오 등을 기반으로 만든 ‘희로애락’(2023) 등을 선보였다. 원데이터는 다르지만, 생성된 결과물의 스타일은 유사하게 느껴진다. 아나돌은 “모네, 고흐 등도 고유한 화풍을 가졌다”며 “데이터는 물리학 법칙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마르지 않는 물감이다. 형태와 질감이 끊임없이 변화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결과보다 과정이 더 흥미로운 전시다. 열대 우림을 누비며 선주민과 소통하고 최첨단 설비로 수집한 어머어마한 데이터, 제작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흥미롭다. 아나돌은 “LNM은 오픈소스로 만들어져 수집한 데이터를 누구나 사용할 수 있고, 작품 제작 과정에서 재생에너지를 사용했다. 이 전시가 AI를 이용한 윤리적 작업 방식의 좋은 예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기술에 관한 한, 아나돌은 낙관주의자다. 그는 “AI가 내 마음의 확장이라고 믿는다. 50대 50의 협력, 공동창조”라며 “AI가 인류에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AI는 인류의 거울이라고 생각하며, 우리가 선하면 AI도 선할 것이다. AI가 인류에게 창의성, 현실에 대한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중요한 가능성을 가져다줄 것”이라고 말한다.

전시를 관람할 때 안내 브로셔와 실제 전시 내용에 일부 차이가 있으니 확인하는 것이 좋다. 3관 전시가 산호에서 물과 관련된 작품으로 개막 직전 변경됐다. 전시는 12월8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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