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죽음…행복한 순환

글·사진 김종목 기자

문학과 미술의 만남… 박범신·안종연 ‘시간의 주름’전

어두운 소설 분위기 빛으로 밝게 표현… 학고재서 내일부터

“나는 늙기가 너무 힘들다. 인생이란 게 중년이 넘으면 시간과의 투쟁이다.”

중견작가 박범신(63)은 50대 중년남녀의 사랑을 다룬 장편소설 <주름>(2006년작·랜덤하우스)을 통해 이렇게 탄식했다. 작가는 이 책에서 늙어가는 육신을 부여잡고 파멸에 이르는 주인공들의 불륜을 담았다. 죽음과 소멸에 방점을 둔 소설은 어둡고 칙칙하다.

작가 안종연의 주제 의식과 작품 의도가 집약적으로 나타난 작품인 ‘바이칼의 에젠’(에폭시·크리스털 가루 등 혼합재료, 145×290㎝,(2009)) | 학고재 제공

작가 안종연의 주제 의식과 작품 의도가 집약적으로 나타난 작품인 ‘바이칼의 에젠’(에폭시·크리스털 가루 등 혼합재료, 145×290㎝,(2009)) | 학고재 제공

안종연(57)은 <주름>을 모티프로 평면과 입체 작업을 하면서 소설의 어두운 분위기를 걷어냈다. 소설 속 죽음과 소멸의 기조는, “생성(탄생)과 소멸(죽음)은 경계 없는 동숙자”(박범신)라는 말처럼 안종연 작품에서 탄생과 생성의 이미지로 부활했다.

화가 안종연와 소설가 박범신의 만남. 이들은 2007년 문학사랑과 대산문화재단이 마련한 ‘문학과 미술의 만남전’의 2010년 작가로 선정되면서 이루어졌다.

박범신과 안종연(오른쪽).

박범신과 안종연(오른쪽).

박범신은 글로 그림을 그린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공감각의 감수성을 잘 표현해온 작가다. 박범신은 안종연에게 “내가 쌀을 주었으니 당신이 그것으로 떡을 만들든 밥을 짓든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안종연은 “(박범신씨가) 삽화를 원했더라면 제대로 되지 않았을텐데 마음대로 하라고 해 작품이 잘 나온 것 같다”고 했다.

두 사람은 생멸 즉 ‘시간의 주름’이라는 소설 주제를 두고 깊은 이야기를 나눴다. 박범신의 말이다. “만나자마자 (주제를) ‘주름’으로 하자고 했어요. 우주의 파장도 주름이고, 아이 내장도 주름입니다. 생멸이면서 명암인 주름 없이 존재 자체는 불가능하죠.” 3일부터 학고재에서 열리는 첫 전시회 이름도 ‘시간의 주름’으로 정했다.

안종연은 ‘주름’을 탄생과 생성을 향한 열망의 이미지로 전환했다. 그는 “소멸과 죽음의 다음 순간은 경이롭다. 그래서 새롭고 환하게 표현했다. 즐겁고 행복한 순환을 담았다”고 한다.

안종연이 잡아낸 건 ‘빛’이다. 안종연은 “생명 자체가 빛이니까 빛으로 말하려 했다”고 한다. 또 바이칼 주변 호수에 살던 이들이 사람에게 깃들었다고 믿었던 ‘에젠(ezen·靈·영)’을 형상화했다. 안종연의 의도가 집약적으로 나타난 작품은 ‘바이칼의 에젠’이다. 바이칼 호수는 소설 <주름>의 여주인공 천예린이 숨을 거두는 장소이며, 천예린을 찾아 나선 김진영의 유랑이 끝나는 장소다. 안종연은 바이칼 호수에 두 주인공의 여정과 유랑의 경유지인 케냐와 이집트, 모로코, 스코틀랜드 최북단 오크니 제도의 풍광을 담았다. 안종연은 “여행 가는 기분으로 한번도 가본 적 없는 바이칼호를 상상해 그렸다”고 말했다.

안종연의 작품은 노동집약의 결과물이다. ‘짱짱한 얼음의 느낌’을 주기 위해 밑그림 위에다 에폭시를 부어 다시 그리는 작업을 거듭했다. 에폭시뿐만 아니라 스테인리스 스틸, 유리, 돌, 두랄루민, 조명같이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를 가지고 평면과 입체, 영상과 설치 작품 60여점을 만들었다. ‘빛의 에젠’ 연작은 스테인리스 스틸에 드릴로 수만번의 점을 찍은 것이다. 이 노동집약의 작품들에 대해 박범신은 “그림 소재가 프레임 밖으로 뛰쳐나오려고 하는 것 같다. (안종연씨는) 입체에 대한 강한 욕망을 갖고 있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두 사람은 ‘만남’에 만족해하는 표정이다. 안종연은 “개인전을 할 때마다 혼자 장보고 요리했는데, 이번에는 의논하면서 밥상을 차려 좋았다”고 말했다. 박범신은 “(안종연이) 평생 해왔던 모든 작업이 총집결되고, 화가로서 살아온 시간의 주름이 소설가로 살아온 나의 주름과 중첩되길 바랐다”고 말했다. 그는 “드라마든 영화든 내 작품이 다른 장르로 갔을 때 한 번도 좋았던 적이 없고, 짜증날 때도 많았는데 이번에 그런 실망이 없어 행복했다”고 한다.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의 생애를 그린 박범신의 최근작 <고산자>를 모티프로 한 작품도 선보인다. ‘문장 속 그림’과 ‘그림 속 문장’이 선순환하는 느낌의 전시회다. 28일까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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