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불평등·불의에 무관심과 냉소 연대의 가치 잠식당하는 유럽

서영찬 기자

도덕적 불감증

지그문트 바우만, 레오니다스 돈스키스 지음·최호영 옮김

책읽는수요일 | 376쪽 | 1만6000원

돌이켜보면 튀니지에서 시작한 민주화 바람이 리비아, 이집트로 이어졌던 ‘아랍의 봄’ 앞에서 유럽은 침묵했다. 다른 나라 정국에 감 놔라 배 놔라 하긴 어렵지만, 유럽연합 정부들은 의아할 정도로 무신경했다. 정부 반대편에 선 제도권 정당도 먼발치에서 바라볼 뿐 오십보백보였다. 결국 아랍의 봄은 오래 못가 시들어버렸다.

[책과 삶]불평등·불의에 무관심과 냉소 연대의 가치 잠식당하는 유럽

아랍의 봄처럼 민주주의와 자유주의의 확산을 응원해온 유럽 정치가 달라진 것일까. 정치평론가들은 이런 현상을 유럽 극우세력의 약진과 연관지어 설명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들은 이를 ‘아디아포론’ 개념으로 설명한다. 그리스어 아디아포론은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는 뜻이다. 타인에게 일어나는 일을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여기는 태도이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지 못하고 구경만 하는 인간의 속성이 아디아포론인데 ‘도덕적 불감증’의 하나이다. 저자들은 현대 유럽의 정치적 속성을 아디아포론에서 찾는다. 그래서 이웃 국가에서 경천동지할 변혁이 발생해도 좀처럼 정치적 공감을 표시하지 않는다. 유럽은 지금 정치적 감수성 상실과 도덕적 불감증을 앓고 있다는 게 저자들의 진단이다. 이는 정당뿐만 아니라 개인도 마찬가지다.

바우만은 우리가 지진이나 홍수에는 즉각적으로 반응해 행동에 나서지만 소득과 삶의 불평등에는 무심한 태도가 아디아포론의 단적인 예라고 강조한다.

그에 따르면 아디아포론이 바이러스처럼 유럽을 떠돌며 냉소라는 병증을 유발해 유럽은 연대의 가치를 잠식당하고 있다. 유럽의회 의원을 지낸 철학자 돈스키스와 바우만은 유럽의 정치·문화를 논한다. ‘유럽 정치·문화는 어쩌다가 이 지경이 되었는가’가 이들의 논점이다.

무엇보다 정치가 자본에 종속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다. 자유주의·민주주의의 위기도 정치와 자본의 권력 역전 구조에서 발생한다는 게 이들의 일치된 견해다. 시민 차원에서는 소비적 감수성이 정치적 감수성을 압도해버렸다. 소비에 안주하면서 파편화되고 공감하는 능력을 잃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무슬림, 난민, 북아프리카 이주자, 집시 등 ‘바깥’에 대한 불안과 공포가 커지는 원인도 같은 맥락이다. 바우만은 주권자들이 비정규직처럼 불안정한 고용의 굴레에 빠져들수록 정치적 감수성을 잃게 된다고 일갈한다.

그렇다면 유럽 정치의 미래는 있는가. 돈스키스는 자못 비관적이다. 유럽은 이제 특유의 영적, 실천적 힘을 되찾기 힘들 것이라고 내다본다. 최근 서구의 몰락을 예견한 슈펭글러의 인기가 되살아난 것도 유럽의 운명을 비관적으로 보게 한다. 반면 바우만은 유럽의 몰락 견해에 찬성하지 않는다. 바우만은 유럽 문화의 적응력, 혁신적 자세, 재생력 등이 여전하다고 믿는다. 그는 성급한 예언은 경계한다면서도 슬며시 해답을 제시한다. ‘어떤 집단적 사명에 대한 비전의 공유’가 그것이다. 군사력, 경제력으로는 출구를 찾을 수 없다고 단정하는 그는 유럽이 축적해온 문화 속에서 그것을 추출해내라고 조언한다. 바로 ‘귀속감의 재발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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