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양손잡이 읽기 뇌’를 키워 줘라

정유진 기자

다시, 책으로

매리언 울프 지음·전병근 옮김

어크로스|360쪽|1만6000원

[책과 삶]‘양손잡이 읽기 뇌’를 키워 줘라

디지털 시대 ‘스크린 훑어 보기’에 빠지면 뇌의 ‘읽기 회로’ 퇴화
타인의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길은 ‘깊이 읽기’를 통해 가능
어릴 때부터 인쇄 매체와 디지털 매체 나란히 읽는 습관 들여야

우리는 하루에 엄청난 양의 글을 읽는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검색하고, 사무실에 들어오면 e메일을 열어본다. 컴퓨터로 각종 보고서를 검토하다가도 틈틈이 스마트폰을 열어 페이스북이나 트위터를 체크한다. 퇴근 후에는 태블릿PC로 소설을 읽거나, 수많은 인터넷 커뮤니티들을 순례하곤 한다.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의 연구에 따르면, 한 사람이 매일 다양한 기기를 통해 소비하는 정보의 양은 34기가바이트(GB)에 달한다고 한다. 무려 10만개의 영어단어에 가까운 양이다. “마치 꿀에 사로잡힌 벌새처럼” 이 글에서 저 글로 바쁘게 옮겨다니며 너무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들이붓는 것은 연속적이거나 집중적인 읽기가 되기 어렵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면 “발작적인 활동이 여러 차례 이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디지털 시대의 과잉정보에 노출된 사람들이 인지적 과부하에 빠지지 않기 위해 새로 터득해 낸 읽기의 표준방식이 ‘훑어보기’다.

읽기 행태와 안구 운동을 연구하는 전문가들은 사람들이 디지털 기기로 글을 읽을 때 흔히 F자형 혹은 지그재그로 텍스트상의 ‘단어 스폿’을 재빨리 훑어 맥락부터 파악한 다음 맨 끝의 결론으로 돌진하는 패턴을 보인다고 말한다.

이런 훑어보기 방식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의문을 가진 노르웨이의 학자들이 실험을 했다. 이들은 학생들에게 절반은 전자책인 ‘킨들’로, 나머지 절반은 종이책으로 그 나이대라면 누구나 좋아할 만한 단편 연애소설을 읽게 한 후 질문에 답하게 했다. 그 결과 종이책으로 읽은 학생들이 스크린으로 읽은 학생들보다 줄거리를 시간 순으로 재구성하는 능력이 더 뛰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디지털 화면으로 읽은 학생들은 덜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건너뛰며 빠르게 훑어 읽은 탓에 세부적인 사건의 순서를 놓치는 경향이 컸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실 소설에서 의미 없는 사건이란 없다. 아내가 남편에게 시곗줄을 사주기 위해 자신의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잘라 팔고, 남편은 아내에게 빗을 사주기 위해 아끼는 시계를 팔았다는 오 헨리의 단편소설을 읽으면서 세부적인 내용을 건너뛴다면 이 이야기의 감동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까.

문제는 ‘블리딩 오버(bleeding over)’ 현상이다. 빠른 정보처리 속도가 특징인 스크린으로 글을 읽는 습관이 반복되다 보면, 스크린을 끄고 책이나 신문을 집어든다 해도 그런 방식의 읽기가 계속된다는 것이다.

10년 전 <책 읽는 뇌>란 책을 통해 독서의 창조적 상상력을 강조했던 이 책의 저자 역시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블리딩 오버’ 현상을 피해갈 수 없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큰 영향을 주었던 헤르만 헤세의 <유리알 유희>를 다시 펼쳐 들었다가 “뇌를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을 받았다. 도저히 읽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뱀 같은 문장 구조는 그를 혼란에 빠뜨렸고, 두 번 이상 생각해야 하는 어려운 단어들 때문에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그는 텍스트를 조금 천천히 읽어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디지털 기술이 급속히 발달해 온 지난 10년 동안 매일 기가바이트 분량의 글을 소화하면서 빠른 읽기 속도에 익숙해진 탓에 헤세의 메시지를 곱씹어 볼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저자는 앞으로 디지털 시대의 읽기 방식이 우리 뇌의 읽기 회로를 완전히 바꿔놓을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우리는 ‘읽기’를 말하고 숨 쉬는 것만큼이나 당연한 행위로 여기지만, 사실 문자가 발명되지 않은 6000년 전까지만 해도 인류에게 읽는다는 행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아이들은 딱히 가르쳐주지 않아도 본능에 따라 말을 습득할 수 있지만, 읽기는 다르다. 인간의 타고난 능력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 뇌에는 읽기에 필요한 신경회로를 발달시킬 유전적 프로그램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것은 뇌의 가소성 덕분이다. 필요에 따라 신경망을 다시 조합해 새로운 경로를 만들어내는 놀라운 능력이다. 뇌가 읽기를 학습하면 본래 물체나 얼굴의 특징을 식별하기 위해 조직화됐던 망막 뉴런 일부가 글자의 작은 특징들을 파악하는 새로운 기능을 부여받기 시작한다.

저자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디지털 세계의 엄청난 정보들을 소비하느라 ‘훑어 읽기’에 익숙해진 우리 뇌의 읽기회로가 ‘깊이 읽기’ 기능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디지털 기술의 장점을 향유하면서도 ‘깊이 읽기’를 통한 비판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인쇄 매체와 디지털 매체 각각의 특성에 맞는 읽기 기술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는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디지털 세계의 엄청난 정보들을 소비하느라 ‘훑어 읽기’에 익숙해진 우리 뇌의 읽기회로가 ‘깊이 읽기’ 기능을 영영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고 경고한다. 디지털 기술의 장점을 향유하면서도 ‘깊이 읽기’를 통한 비판적 사고와 공감 능력을 지켜내기 위해서는, 아이들이 인쇄 매체와 디지털 매체 각각의 특성에 맞는 읽기 기술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훈련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 이는 학습 환경에 따라 뇌의 읽기 회로가 매우 다르게 형성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깊이 읽기’에 숙달된 독자의 시각 피질은 글자의 표상으로 꽉 차 있다. 심지어 글자를 보지 않고 상상만 해도 마치 실제로 본 것처럼 그 글자의 표상에 상응하는 시각 피질의 전담 뉴런 집단이 발화한다. 숙달된 독자는 문장을 읽는 동안 단어들을 더 오랫동안 작업 기억에 붙잡아 둘 수 있어서 문장의 내용을 유추하고 추론하며 사고를 심화시키면서도 흐름이 끊기지 않고 책을 읽어나갈 수 있다.

그러나 문자 문화에서 디지털 문화로 옮겨가는 도중 단어를 기억 속에 붙잡아 둘 수 있는 주의 지속시간은 10년 전보다 절반으로 줄었다. 언제든 접속할 수 있는 외장형 기억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다 보니 디지털 세계에서는 과거와 같은 방식으로 기억할 필요가 없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미국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tl:dr’(too long, didn’t read. 너무 길어서 읽지 않았다)이라는 말이 유행한다. “단어들의 얕은 표면을 물거미처럼 가로지르는 훑어보기”만으로는 정보가 피상적인 수준에서 일종의 오락으로만 지각된다. 이는 사고를 심화시키는 심층적인 독서를 방해한다.

저자는 “사용하라, 그러지 않으면 잃는다”는 뇌신경의 기본원리처럼, 인류가 수천년에 걸쳐 발달시켜 온 깊이 읽기 회로를 계속 개발하고 사용하지 않으면 퇴화해서 사라질지도 모른다고 우려한다. 특히 걷기도 전에 아이패드를 입에 물고 자라나는 요즘 아이들의 뇌에는 깊이 읽기 회로가 아예 제대로 형성조차 되지 않을 수도 있다.

읽는 방식의 변화는 쓰기에도 영향을 미치며 악순환을 거듭한다. 독자들이 복합 구문과 비유적 표현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 작가들이 단어를 선택하는 폭이 좁아지고 원고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한다. 깊은 사유 끝에 어렵게 얻은 진실과 아름다움을 펼쳐 보이기 위해 사려 깊게 배열한 단어와 문장을 구사한 헤르만 헤세는 아마 요즘 같으면 책을 내 줄 출판사도 찾지 못할지 모른다.

저자가 요즘 베스트셀러 소설을 20세기 초·중반 작품과 비교해 보니, 문장에 사용된 구와 절의 수가 급감하면서 문장의 평균 길이가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불운한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은유와 비유가 가득했던 책과 시들은 스크린 위의 읽기가 요구하는 규격에 맞춰 팔다리가 잘려 나가고 있는 것이다.

혹자는 반문할지도 모른다. 언어의 본성은 시대마다 변화하는 것이 당연한 것 아니냐고. 변화의 흐름에 맞춰 그 시대가 요구하는 최상을 추구하는 것이 글쓰기의 역사 아니냐고. 해묵은 책과 시집이 꽂힌 서가를 아쉬워할 사람은 엘리트계층일 뿐일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저자는 “정작 내가 걱정하는 것은 엘리트주의와는 정반대의 어떤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는 어릴 때 읽은 책들 덕분에 자신은 미국 중서부 소도시인 일리노이주 엘도라도시의 석탄 광부와 농부들 곁을 떠나지 않고도 도시 밖의 세상을 새로운 마법으로 이해할 수 있었고, 넓어진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물론 디지털 기술로도 세계 각지의 사람들과 연결돼 본 적 없는 세계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실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저자는 특별한 감정이입을 통해 타인의 관점과 생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경험은 오직 ‘깊이 읽기’를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프루스트는 이를 ‘고독 속에서 일어나는 소통의 비옥한 기적’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훑어 읽기’만으로는 <아이 엠 낫 유어 니그로>를 읽으면서 영혼을 앗아가는 노예제의 패악과 그런 비운에 처했던 사람들의 절박감을 느끼는 데 한계가 있다. 정보와 주의과잉인 디지털 환경 속에서는 ‘인지적 인내심’이 상실돼 “쉽게 소화되고 밀도가 낮으며 지적인 부담도 적은 익숙한 골방으로 뒷걸음치고 싶다는 유혹”을 느낄 수밖에 없다. 저자는 지난 20년간 젊은이들의 공감능력이 40% 감소했다는 매사추세츠공대(MIT) 셰리 터클 교수의 조사 결과를 인용하면서 “공감의 느낌이 단절되면, 자신도 모르게 타자에 대한 무지와 공포, 불관용에 이르게 된다”고 우려한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가 디지털혁명의 반대자인 것은 아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디지털 기술이 이뤄낸 성취를 버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종이책을 통해 우리가 지금까지 얻어온 것을 잃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저자는 어린아이들에게 ‘양손잡이 읽기 뇌’를 키워줘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는 인쇄 기반 읽기 능력과 디지털 기반 읽기 능력을 모두 갖춘 뇌를 말한다.

마치 이중 언어를 배우는 다문화 가정의 어린아이가 한 가지 언어에서 다른 언어로 옮겨갈 때마다 저지르는 불가피한 실수를 점차 극복하면서 어떤 언어로도 깊이 사고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는 것처럼, 이런 과정을 아이들의 읽기 훈련에도 이식하자는 주장이다. 아이들이 인쇄 매체와 디지털 매체 사이에서 자유롭게 코드를 변환해가며 넘나들 수 있도록 두 읽기 수준을 나란히 발달시켜주면, 스크린으로 읽을 때의 ‘훑어보기’ 습관이 상대적으로 속도가 느린 인쇄물 읽기 과정까지 잠식하는 ‘블리딩 오버’ 현상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이를 위해 저자는 아이들에게 종이책과 인쇄물 읽기를 먼저 가르친 다음, 아이가 스크린으로 읽기를 시작하자마자 ‘반대 기술’을 반복해서 훈련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스크린으로 읽을 때도 자신이 읽는 동안 이해한 것을 규칙적으로 점검하고 세부 내용을 기억하도록 훈련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은 읽기에서 중요한 것은 ‘속도’와 ‘양’이 아니라, 유추와 추론을 통해 자신만의 ‘의미’를 찾아내야 한다는 점이다. 호모사피엔스가 6000년 전 우리에게 남겨준 가장 위대한 발명품인 ‘문해력’을 더욱 풍성하게 발전시키기 위해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능하면 빠르게, 필요하면 느리게” 읽는 기술이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일단 다시, 책으로 돌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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