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동시대 첨예한 윤리 탐색하는 집요한 시선…'다른 세계에서도' 펴낸 이현석 소설가

선명수 기자
첫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를 펴낸 이현석 작가를 지난달 22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소설집에는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사회문제와 윤리적 쟁점들을 예리하게 짚은 작품들이 수록됐다. 우철훈 선임기자

첫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를 펴낸 이현석 작가를 지난달 22일 서울 서교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소설집에는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사회문제와 윤리적 쟁점들을 예리하게 짚은 작품들이 수록됐다. 우철훈 선임기자

현 시기 한국 문학에서 주목해야 할 신예 작가를 꼽는다면 이현석(37)의 이름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2017년 단편 ‘참(站)’으로 등단한 후 꾸준히 작품을 발표해오며 지난해 제11회 젊은작가상을 수상했다. 8편의 단편을 묶은 그의 첫 소설집 <다른 세계에서도>(자음과모음)가 최근 출간됐다. “이 작품집은 새로운 계보의 리얼리즘을 촉발할 것”이라는 소설가 박민정의 추천사처럼, 동시대의 가장 첨예한 사회문제와 윤리적 쟁점들을 예리하게 짚은 소설들이 수록됐다.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표제작이자 젊은작가상 수상작인 단편 ‘다른 세계에서도’에서 산부인과 의사인 ‘나’에게 의사 선배인 ‘희진 언니’는 이렇게 말한다. 소설은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헙법불합치 결정 전후의 논의를 다루는데, ‘낙태죄 폐지’란 결론에 닿기 위한 운동의 방법론에 있어서도 인물들의 입장은 조금씩 엇갈린다. 희진 언니는 대중의 반감을 피하는 방식을 지향하지만, ‘나’는 현실의 문제를 유보하거나 덮어버리는 그런 ‘설득의 이중언어’가 불편하다. 그리고 “이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이어야 하지 않을까. 기약할 수 없는 언제인가가 아닌 지금 당장이어야 하지 않나”라고 되묻는다. 소설은 임신중지와 재생산권이라는 뜨거운 사회 이슈에 동생의 갑작스러운 임신이란 이야기를 엮어내면서 인물들의 다층적인 시선과 딜레마를 섬세한 서사로 구축한다.

지난달 22일 서울 서교동에서 만난 이 작가는 “내 일상과 조응할 수밖에 없는 문제들이 소설 안에 들어오는 것 같다”고 말했다. “제가 특별히 사회성 짙은 이야기를 쓴다고 생각하진 않아요. 여러 사회적 사건들 가운데서도 많은 이들에게 공통 경험을 준, 일상에 당면한 문제들을 쓰게 됩니다. 어떤 문제도 100% 옳거나 그른 것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서사로 풀어가다 보면 답을 구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서 출발하지만, 늘 그렇듯 정답이란 건 없다는 생각도 듭니다.”

돋보이는 것은 어느 쪽에도 쉽게 함몰되지 않는 엄정하고 예민한 시선이다. 이현석의 소설 속 인물들은 어떤 ‘옳음’을 향해 무작정 돌진하기보다는 그 방향성에 대해 끊임없이 숙고하고, 회의한다. 큰 목소리로 정답을 확언하기보다 그것에 질문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 엄정함은 바깥 세계 뿐만 아니라 스스로에게도 향해 있다.

[인터뷰]동시대 첨예한 윤리 탐색하는 집요한 시선…'다른 세계에서도' 펴낸 이현석 소설가

소설집의 문을 여는 단편 ‘그들을 정원에 남겨두었다’는 작가의 그런 시선과 고민을 엿볼 수 있는 작품이다. 의사이면서 소설가인 화자가 등장하는데, 그가 담당한 한 환자의 사연을 대학 동기인 의사 ‘수연’이 글로 써 인터넷에 올리면서 갈등이 시작된다.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는 과거 커밍아웃을 하며 가족을 떠난 중년 남성으로, 그의 동성 연인이 병원을 찾지만 어떤 관계도 인정받지 못한 채 가족들에게 쫓겨난다. ‘나’는 생활동반자법 공론화를 위해 환자 이야기를 동의없이 각색해 올린 ‘수연’을 비판하지만, 되레 ‘수연’은 ‘나’에게 이렇게 받아친다. “넌 물어봤니?” 2년 전 화자가 쓴 소설 속 인물의 모티프가 수연이었고 수연 역시 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더구나 ‘나’는 서로의 임종을 지켜주자고 약속한 두 노인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을 구상 중이다. 소설은 이렇듯 재현과 타자화의 문제에 대해 간단치 않은 질문을 던진다. 이현석 작가 자신이 직업환경의학을 전공한 의사이면서 소설가이고, 이 소설은 그가 책의 말미에 밝혔듯 “내가 가진 두 직업 간의 괴리에 대해, 특히 ‘재현’이라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충돌에 대해” 숙고한 결과물이기도 할 것이다.

“데뷔하고 2년쯤 후에 쓴 소설인데, 생각보다 일찍 등단하게 되면서 글쓰기의 대상이 되는 사람과 작가의 관계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을 시작하게 됐어요. 의료인의 글이 온·오프라인에서 활발하게 나올 때였는데, 의료윤리학회지에 실린 ‘의료인의 글쓰기’를 다룬 논문을 보고 비슷한 고민을 하는 동료들과 토론하면서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됐습니다. 대면 업무를 하는 전문직이 자신의 환자 또는 내담자에 대해 다룬 글들이 꽤 많이 나오는데, 그에 대한 가이드라인도 없고 윤리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지점도 있죠. 이 소설이 얼마나 반응을 얻을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글을 쓰는 사람 뿐만 아니라 출판사들도 고민해볼 지점이라고 생각합니다.”

8편의 단편 모두 몰입감이 상당하다. 1980년 5월 광주의 한 병원을 배경으로 한 소설(‘너를 따라가면’)부터 집단 망각 속 반복되는 산업재해를 다룬 소설(‘눈빛이 없어’), 개인의 트라우마로 남은 시대적 상흔(‘라이파이’)과 ‘시장화된 사랑’을 농밀한 감정선으로 그려낸 소설(‘컨프론테이션’)까지 작가는 다채로운 소재를 생명력 넘치는 이야기로 직조해낸다. 그렇게 소설은 ‘지금 이 세계’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직시하며 무엇을 어떤 방식으로 기억할 것인지를 끈질기게 고민한다. 첨예한 사회문제를 다루면서도 그 속의 개인이 처한 윤리적 딜레마를 탐색하는 작가의 집요한 시선이 돋보인다. 이 작가는 “나의 옳음과 그름에 대해서만 이야기한다면 문학이란 장르가 저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을 것”이라고 했다. “소설은 타자가 되어볼 수 있는 작업이라는 점에서 매력적입니다. 나와 아예 다른 사람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 쓰고 싶고, 그렇게 써야하는 이야기가 있다고 생각해요. 저 자신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지는 작업을 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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