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나쁘다는 게 아니라 더 다양한 주거 선택지가 필요”

배문규 기자

한국 ‘보통의 집’의 100년 계보 정리한 박철수 교수

<한국주택 유전자 1·2>를 펴낸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정동아파트에서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65년 준공된 정동아파트는 중산층 아파트 시대의 개막 전 정부가 공급한 서민아파트의 전형이다. 6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시화석과 같다.   권도현 기자

<한국주택 유전자 1·2>를 펴낸 박철수 서울시립대 교수가 지난 16일 서울 중구 정동아파트에서 책의 내용을 소개하고 있다. 1965년 준공된 정동아파트는 중산층 아파트 시대의 개막 전 정부가 공급한 서민아파트의 전형이다. 60년 가까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도시화석과 같다. 권도현 기자

“지난 100년 동안 ‘보통의 집’을 살펴봤습니다. 거울 속 내 얼굴에서 어머니의 눈을, 할아버지의 귀를 발견하잖아요. 우리의 주거도 수많은 주택들이 영향을 주고받고 결합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의 모습이 된 것입니다.”

한국 사회에서 집만큼 문제적 화두가 있을까. <한국주택 유전자 1·2>(사진)는 20세기 한국에 지어졌던 거의 모든 주택을 샅샅이 살펴보는 책이다. 1권은 1920년대부터 1950년대 말까지 식민지, 전쟁, 이촌향도 등으로 주택이 절대 부족했던 시기 주택들을 살펴보고, 2권에선 1960년대 전후부터 서울과 전국의 풍경이 어떠한 경로를 거쳐 지금의 모습이 되었는지 추적한다. “아파트는 어떻게 절대 우세종이 되었을까?”라는 질문이다. 지난 16일 경향신문사에서 만난 박철수 서울시립대 건축학부 교수(62)는 “‘선택권을 부여받지 않은’ 보통 사람들이 사는 집의 계보를 그려봤다”면서 “오늘의 나, 우리의 집을 돌아보는 일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1권 708쪽, 2권 654쪽에 도판 1150컷. 말 그대로 ‘벽돌책’이다. 25개 장에 걸쳐 ‘부영주택’ ‘영단주택’ ‘DH주택’ 등 이름도 생소한 집들을 살펴보고, 깨알 같은 글씨로 장마다 5~6쪽에 이르는 주를 달았다. “코로나19 시대를 알차게 보냈다고들 하시는데(웃음). 대한주택공사 연구원으로 일하던 서른살 무렵부터 30년 넘게 쌓은 자료로부터 나온 책입니다. 100여종 집들을 ‘유전적 속성’에 따라 고시조, 중시조, 형제지간으로 엮어 얼개를 만드는 데만 10년 걸렸고요. 2011년 출판사와 계약해 2019년 말 초고를 넘겼습니다.”

책의 시작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을 전후해 조선에 본격 보급된 ‘관사와 사택’이다. “집은 ‘하우스’와 ‘하우징’을 구분합니다. 하우스는 사는 사람 요구에 따라 짓는 것이고, 하우징은 아파트처럼 표준화된 대량 공급이죠. 하우스가 전근대라면 하우징은 근대의 산물입니다. 일제가 식민지 경영을 위해 지은 관사와 사택에서 한국 주택의 시작을 살펴볼 수 있죠.” 관사와 사택은 이후 표준화된 주택을 짓는 데 견본이 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이라는,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으로 나뉘는 주거 위계화도 이 시기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관사·사택’에 뿌리 둔
표준화된 주택 보급·주거 위계화

총주택 중 62% 차지한 ‘절대 욕망’
“한국 아파트는 성장 시대의 유물
1인 가구 늘어난 지금도 유효한가”

“아파트 나쁘다는 게 아니라 더 다양한 주거 선택지가 필요”

통계청 2019 인구주택총조사에선 총주택 1813만호 중 아파트가 1129만호로 전체의 62.3%를 차지했다. 일제강점기 한반도에 출현한 아파트는 수십년 만에 한국인의 ‘절대 욕망’이 됐다. 단지형 아파트 출발을 알린 종암아파트와 개명아파트, 한국 주거사의 분수령이 된 마포아파트, 고급화를 이끌며 브랜드 아파트를 예견한 맨션아파트를 지나 이르는 것은 잠실주공아파트단지다. 잠실주공은 ‘근린주구(近隣住區)론’의 교과서적 사례로 꼽힌다. 단지 내부에 학교와 커뮤니티 시설이 배치되고, 도로로 둘러싸인 단지에 드나드는 차량을 차단기가 철저히 통제하는 대단지 아파트의 전형이다. 신도시에서, 신축아파트에서 안팎의 모습만 바뀌었을 뿐 40년 넘게 같은 모델이 반복되고 있다. “한국 아파트는 성장 시대 유물입니다. 오늘날 고성장 시대가 끝났다는 데 모두 동의할 겁니다. 그렇다면 출생률은 떨어지고, 1인 가구는 늘고, 생활동반자법이 이야기되는 시대에 이성애 정상가족 모델에 기반한 부부 침실, 자녀 방 두 개가 유효할까요.”

박 교수가 지적하는 한국 주택의 문제는 선택지가 없다는 점이다. 책 마지막이 ‘다’자 주택, 즉 다세대·다가구로 끝나는 구성이 의미심장하다. “한국 아파트 문제는 단독주택의 문제입니다. 아파트는 기업이 알아서 인프라 깔고, 정부는 공급계획 관리만 하면 되니 너무 좋죠. 사람들도 수십년 동안 아파트 환경이 월등하다는 것을 학습했고요. 그 결과가 아파트 바깥 남루한 골목길 풍경입니다.” 오늘날 집값 폭등이 아파트 중독의 부작용일 수 있다는 얘기다. “지금은 차 한 대만 있어도 주차 때문에 아파트를 선호할 수밖에 없어요. 공급론에 매몰될 것이 아니라, 단독·다가구 밀집지역 인프라 개선이 주거정책의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한국 주택사는 정권의 명운을 건 정치적 역사이기도 했다. 그 중심에는 세계에서 주택을 가장 많이 공급한 회사로 꼽히는 대한주택공사가 있다. 대한주택공사와 한국토지공사가 합쳐진 LH는 직원 부동산 투기로 지탄의 대상이 되고, 공공주택은 혐오의 대상이 되어버렸다. 박 교수는 그럼에도 “공공임대주택의 혁신적 공급 확대”를 주장한다. “한국은행이 통화에 개입하는 것처럼 정부에서 공공임대 물량을 충분히 갖춰야 개입이 가능합니다. 재개발·재건축에서 공공을 따로 뺄 게 아니라 민간사업자 아파트를 그냥 적정 가격에 사들이면 됩니다. 그래야 낙인을 피하고 여럿이 섞여 사는 사회를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신규 택지가 없다고 할 게 아니라 기존 단독주택지 주거환경 개선과 소규모 개발을 병행해야죠. 여러 솔루션을 함께 가져가야 탈출구가 보입니다.”

박 교수는 10년 전 서울의 아파트 생활을 정리하고 경기 용인시에 집을 지어 이사했다. 경사 지붕이 있는 2층 붉은 벽돌집이다. 집 앞 공원의 살구나무가 마당까지 가지를 뻗어 ‘살구나무집’이다. “아파트가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단독주택도 일상이 바쁘면 누릴 시간이 없어요. 집은 자신이 가꾸려는 삶의 모습에 따라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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