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자의식 민족주의’ 펴낸 임지현 서강대 교수 “위안부 문제, 이젠 ‘희생자 담론’ 넘어서야”

이혜인 기자

폴란드·독일·한국 등 사례 넘나들며 ‘우월한 희생자’ 논쟁 다뤄
“가해자·희생자 이분법적 세계관에선 홀로코스트 등 비판 한계
위안부 피해 ‘트라우마’ 끊임없이 끄집어내는 우리사회도 문제”

임지현 교수는 지난 1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민족, 국가를 역사의 ‘희생자’로 위치시키면서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설명하면서 “ ‘내가 너희들보다 더 큰 희생자인데’라고 생각하면 역사적 화해가 정체되는 현상이 생기고, 가해자가 용서를 빌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임지현 교수는 지난 11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자신의 민족, 국가를 역사의 ‘희생자’로 위치시키면서 스스로 도덕적 정당성을 부여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를 설명하면서 “ ‘내가 너희들보다 더 큰 희생자인데’라고 생각하면 역사적 화해가 정체되는 현상이 생기고, 가해자가 용서를 빌 필요가 없어지게 된다”고 말했다. 우철훈 선임기자

1987년 폴란드 사회는 에세이집 한 편으로 발칵 뒤집혔다. 그해 1월 얀 브원스키라는 문학평론가는 <가련한 폴란드인 게토를 바라보네>를 발표했다. 이 에세이는 나치 점령 시기에 폴란드에서 진행된 유대인 이웃 학살을 방관했던 폴란드인의 숨겨진 죄의식을 들추어냈다. 나치의 희생자이자 유대인을 구출한 정의로운 저항자라는 통상적인 폴란드인의 이미지와는 상반되는 것이었다. 많은 폴란드인이 이 에세이의 출간에 대해 분노를 표출했고, 비슷한 문제의식을 지닌 다큐멘터리영화 <쇼아>에 대해 당시 폴란드 공산당은 상영 금지 처분을 내리기도 했다.

임지현 서강대 사학과 교수 및 트랜스내셔널인문학연구소 소장(62)은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책에서 이 같은 사례를 소개한다. 그가 고안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개념은 자국의 역사를 피해자의 역사로 규정하고 이를 토대로 현재 그 나라의 민족주의에 도덕적 정당성과 정치적 알리바이를 부여하는 기억 서사다. 임 교수는 “희생자의식 민족주의가 전제하는 가해자와 희생자의 이분법적 세계관에서는 식민주의, 제노사이드, 홀로코스트 등을 근원적으로 비판할 수 없다”고 짚는다.

<민족주의는 반역이다> <우리 안의 파시즘> <대중독재> 등을 통해 민족주의의 문제를 짚고, 한국 사회에 불편한 질문을 던져온 임 교수가 최근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책을 냈다. 책은 폴란드, 일본, 독일, 한국의 사례를 넘나들며 누가 더 ‘우월한’ 희생자인지를 다투며 국가와 민족주의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현상을 다룬다. 지난 11일 서울 마포구 서강대학교에서 임 교수를 만났다.

그는 2007년 한 칼럼에서 희생자의식 민족주의라는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 당시 한국에서는 일본계 미국인 작가인 요코 가와시마 왓킨스가 쓴 소설 <요코 이야기>가 큰 이슈였다. 주인공인 요코가 2차 세계대전 패전 직후 한반도 북부에서 일본으로 귀환하다 한국인들에게 극심한 괴롭힘을 당한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임 교수는 <요코 이야기>가 사실을 왜곡하거나 탈역사화하는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은 분명하지만 “자신(한국인)의 기억은 ‘정확한 역사’이고, 요코의 기억은 ‘역사의 왜곡’이라고 단정하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임 교수는 “처음에는 일종의 ‘피해자’ 민족이라고 할 만한 한국, 폴란드, 이스라엘에 희생자의식 민족주의 개념을 적용하려 했는데, ‘가해자’라고 할 수 있는 독일이나 일본도 스스로 희생자라는 인식을 강하게 가지고 있는 사례들을 보면서 전 지구적인 개념으로 확장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일본은 2차 대전을 일으킨 추축국에 가담했지만, 자신들을 원자폭탄 피해국의 ‘희생자’로 적극 위치시킨다. 책에는 1963년 일본 반핵평화활동가 4명이 아우슈비츠 해방 18주년 기념식에 참석하면서 자신들과 아우슈비츠 희생자들을 동일선상에 놓으려고 한 기록이 나온다.

“일본의 민족주의자들은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거치며 자신들이야말로 진정한 서양 제국주의의 희생자이고, 2차 세계대전은 서양 제국주의에 대한 해방전쟁이었다고 인식하죠. 1950년에 한나 아렌트가 쓴 르포 기사를 보면 독일인은 패전의 고통만 끊임없이 말하고, 아렌트가 스스로를 유대계라고 밝혔는데도 ‘가족은 무사했느냐’는 말 한마디 묻지 않았다고 하잖아요. 모두가 ‘내가 너희들보다 더 큰 희생자인데’라고 생각하면 역사적 화해가 정체되는 현상이 생기고, 용서를 빌 필요가 없어지는 거죠.”

한국도 희생자의식 민족주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2차 대전 종전 후 일본과 아시아 49개 지역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전쟁 관련 B·C급 전범 재판에서 사형 948명을 비롯해 총 5700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는데, 그중 조선인은 사형 23명을 포함해 148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1931년 ‘조선 화교 포그롬 사건’(일명 ‘완바오산 사건’)을 보면, 조선인들은 일본 경찰의 방조 아래 중국 지린성 부근 완바오산에서 중국인 상점과 중국인을 습격하고 방화와 약탈을 자행했다. 임 교수는 “연루된 개개인이 행위의 주체성을 반납하고 역사의 구조 뒤로 숨는 것”이라고 짚는다. 또 “ ‘세습적 희생자’라는 의식에서 벗어나 자신도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 성찰이 21세기 문화적 기억의 서사적 틀이 되어야 한다”며 “세습적 희생자라는 지위는 잠재적인 또는 이미 가시화되고 있는 식민주의의 위험성에 대한 비판을 근원적으로 가로막는다”고 말한다.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우리는 (외세나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저항적 민족주의라고 스스로를 정의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반드시 희생자가 되는 것은 아니죠. 베트남전쟁 때 베트남 입장에서 보면 한국은 가해자죠. 예멘 난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대하는 한국의 폐쇄적이고 공격적인 태도는 어떤가요.”

임 교수는 ‘희생자’ 서사에 가로막혀 있는 더 많은 기억들을 끄집어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전작 <기억전쟁>에서도 그는 가해와 피해의 이분법적 구도를 깨고, 힘없는 역사적 행위자들의 기억과 증언을 복원해야 한다고 했다. 특히 그는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희생자’ 담론을 넘어선 더 많은 이야기들이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전향 장기수 운동과 ‘위안부’ 운동을 보면, 당사자를 부르는 호칭이 한쪽은 ‘선생님’이고, 한쪽은 ‘할머니’예요. 한쪽은 투사인데, 한쪽은 피해자로 불리는 거죠. 우리 사회는 ‘위안부’ 피해자에게 끊임없이 트라우마가 되는 기억을 끄집어내요. 이용수 할머니가 ‘성노예’ ‘위안부’라는 호칭에 문제 제기를 하며 자신을 여성 인권운동가라고 불러달라고 했죠. 누군가는 할머니의 발언에 대해 늙어서 기억이 부정확하다며 공격하기도 했는데, 그게 한국의 ‘위안부’ 역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태도와 무엇이 다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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