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절히 유기하고 싶었던 10대 시절의 기억 ‘1차원이 되고 싶어’

선명수 기자

1차원이 되고 싶어

박상영 지음|문학동네|412쪽|1만4800원

소설가 박상영의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는 2000년대 초중반 한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십대들의 위태로운 사랑과 환희의 순간들,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들여다본다. 소설은 성장통이란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그 시절의 구겨진 마음과 기억들을 비춘다.  ⓒ이관형

소설가 박상영의 첫 장편소설 <1차원이 되고 싶어>는 2000년대 초중반 한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십대들의 위태로운 사랑과 환희의 순간들, 상처와 고통의 기억을 들여다본다. 소설은 성장통이란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그 시절의 구겨진 마음과 기억들을 비춘다. ⓒ이관형

소설은 ‘과거로부터 온 편지’로 시작된다. 심리 상담사로 일하는 ‘나’에게 “오랜만이야”라는 말로 시작되는 메시지가 인스타그램 메신저를 통해 도착한다. 옛 친구의 평범한 안부 인사 같았던 메시지는 재정비 사업이 진행 중이라는 D시 수성못의 소식으로 끝을 맺는다. 그 호수에서 시신이 발견됐고, 빠른 속도로 이 시신의 신원이 밝혀졌다는 것. “그때로부터 셀 수 없이 많은 날이 지났는데, 진실이 여전히 그곳에 남아 있다”는 서늘한 이야기였다.

발신인의 이름은 없지만, ‘1004’라는 아이디로 ‘나’는 이 메시지가 누구에게 온 것인지 짐작한다. 다만 독자는 알지 못한다. 편지가 언급한 15년 전 수성못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의 주인공인 ‘나’는 백골로 발견됐다는 시신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소설은 이제 “십여년 동안 봉인해놨던 기억”을 향해 진입한다. 월드컵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2003년, 세상이 “기이한 열정으로 들끓고” 있던 이른 봄날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10대 시절은 흔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련해지는, 순수하고 아름다웠던 추억이란 말과 함께 자주 소환되지만 누구에게나 그런 것은 아니다. 그 시절을 대체로 아름답게 기억하는 사람에게도, 청소년기의 어느 풍경 속엔 그 어느 때보다 어둡고 가혹한 날들 역시 존재했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10대가 겪는 통과의례라고 간단히 퉁치기엔 여전히 구체적으로 처참하고, 성장통이란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마음의 파편과 같은 이야기들이 존재한다. 박상영의 첫 장편 <1차원이 되고 싶어>는 그 지독하고도 잔인한 시절의 이야기를, 더없이 아름다운 방식으로 건져올린다.

소설의 배경은 2000년대 초중반 교육열이 유달리 높았던 D시 수성구다. 외국어고나 과학고 등 특목고 열풍이 거셀 때였고, 주인공인 중학생 ‘나’ 역시 D시를 벗어나겠다는 목표로 특목고 입시 준비 학원에 다니고 있다. 겉으로 보면 남들과 적당히 어울릴 줄 아는 무난한 모범생이지만, “맹물에 겨우 시럽 한 방울을 탄 것 같은” 흐릿한 존재감은 사실 ‘철저한 계산’의 결과다. 일종의 위장술인 셈인데, 그렇게 감춰야 했던 것들은 가령 이런 것이다. 같은 학교 친구들과 달리 낡은 궁전아파트에 살지만 (학군 배정을 위해 위장 전입한) 외삼촌네 신세계아파트 주소를 내 집 주소처럼 달달 외워 말하고 다닌다는 것, 내가 기억할 수 없을 만큼 어린 시절부터 남들과 달랐다는 것 등이다. 바로 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남자”라는 사실이다.

대한민국과 이탈리아의 16강전이 열린 2002년의 여름날, 떠들썩한 바깥의 소음과 단절된 독서실에서 “더 철저히 혼자”가 되어버린 ‘나’의 앞에 거짓말처럼 ‘윤도’가 나타난다. “전 우주가 대한민국의 8강 진출을 기원하고 있는 이 순간” 한가롭게 독서실에서 <중경삼림>을 보던 윤도가 ‘나’에게 먼저 말을 걸어온다. “너, 해리 포터 맞지?” 알고 보니 같은 학교 옆 반 아이였던 윤도는 다른 애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축구를 할 때 홀로 벤치에 앉아 <해리 포터>를 읽던 ‘나’를 기억한다고 말한다. 청춘 영화의 한 장면과 같은 이 만남을 시작으로 둘은 여름내 오락실과 수영장, 둘만의 아지트인 컨테이너를 오가며, ‘넬’이나 ‘박효신’ ‘푸른새벽’과 같은 (또래들과 다소 다른) 음악 취향을 공유하며 가까워진다. ‘나’는 윤도에게 강한 끌림을 느끼며 특별한 관계를 만들어가는 한편, 같은 학원에 다니는 독특한 여자아이 ‘무늬’와도 친해지며 자신만의 좁은 세계를 벗어나는 해방감을 느끼게 된다. 귓바퀴에 “연습장 스프링처럼 잔뜩” 피어싱을 하고 담배를 지독하게 많이 피우는 무늬는 밸런타인데이에 남자가 남자에게 초콜릿을 주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고, 잔뜩 움츠려 있는 ‘나’에게 “아무에게나 알려주지 않는” 컬렉션이라며 <Let 다이>나 <호텔 아프리카> <나나> 등의 만화를 소개해준다.

간절히 유기하고 싶었던 10대 시절의 기억 ‘1차원이 되고 싶어’

그러나 좋아한다는 고백조차 수없이 망설이고 두려워하게 되는 첫사랑은 그 시절의 ‘나’를 처절하게 할퀴고 지나간다. 특목고 입시에 실패한 ‘나’와 윤도는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하지만, 그 기쁨도 잠시 이제 각자의 삶 앞에 놓인 것은 숨막히는 입시 경쟁과 폭력으로 얼룩진 학교생활이다. 퀴어라는 이유로 또래들에게 잔혹하게 괴롭힘을 당한 친구 ‘태리’를 애써 외면하며, 태리처럼 내몰리지 않기 위해 커져가는 마음을 애써 감춰보지만 그조차도 쉽진 않다. 윤도의 마음은 좀처럼 종잡을 수 없고, 그런 ‘나’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누군가의 협박 문자가 도착한다. 문자의 발신번호는 ‘1004’다.

소설은 화자의 10대 시절인 2000년대 초중반의 이야기와 현재 시점의 ‘과거로부터 온 편지’가 교차되며 전개된다. 백골 시신의 주인과 수성못에 가라앉았다고 믿었던 과거의 비밀, 위태롭고 절망적이면서도 아름다웠던 사랑의 기억이 얽히고설키며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않게 만든다. 전작 <알려지지 않은 예술가의 눈물과 자이툰 파스타> <대도시의 사랑법>으로 한국 퀴어문학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을 받은 박상영은 자신의 첫 장편인 이 책에서 성장소설이나 로맨스소설의 틀로만은 요약할 수 없는 수많은 환희와 절망의 순간들, “문신처럼 뼈에 새겨”진 현재진행형 고통의 기억을 세밀하게 그려보인다.

그 모든 이야기가 지나간 후, 두 명의 등장인물이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짙은 여운을 남긴다. 이는 소설의 초반 독자에게 수수께끼처럼 던져진 편지의 진실이 모두 드러나는 순간이기도 하지만, 타인뿐만 아니라 스스로를 “간절히 유기하고 싶었던” 내가 과거의 나에게 내미는 화해의 손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소설 속 화자처럼 “두고 온 것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해” 그 시절의 구겨진 기억을 가만히 펼쳐본 적이 있는 이들이라면, 이 소설이 주는 위안이 통증처럼 아릿하게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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