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지식인조차 애국·애족에 화답…중국의 다원성이 시들어 간다

김유익 재중문화교류활동가

다시 부는 ‘주선율’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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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6호
<옌거링 嚴歌笭>

올해 7월 중국 공산당 창당 100주년 기념일을 전후해서 장안의 화제가 됐던 <각성년대(覺醒年代)>라는 드라마가 있다. 창당의 주역인 사상가이자 혁명가 천두슈(陳獨秀)를 주인공으로 하지만 신해혁명과 5·4운동 이후 근대 중국의 길을 열기 위해 뜨겁게 토론하는 보수와 진보, 좌우를 망라하는 기라성 같은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이 드라마의 성공이 이례적이었던 것은 정부와 당의 프로파간다와 그 담론을 뜻하는 소위 ‘주선율(主旋律)’ 작품에 거부감을 보일 만한 비주류 청년 지식인과 예술가들조차 호응했기 때문이다. 민족주의 정서와 공산주의 이념을 바탕에 깔고 혁명, 항일 등을 소재로 삼는 주선율 문화는 천편일률적 전개 때문에 개혁·개방 이후 대중에게 외면당했다. 그런데 최근 기술적 완성도가 높아지고 젊은층을 중심으로 애국주의를 자발적으로 수용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자 상황이 급변했다. 국가의 고무, 대중의 화답을 안전판으로 한 자본의 선택이 철의 삼각동맹을 이루니 다른 이야기들은 소외되고 중국 대중문화의 다원성은 시들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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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이머우 감독은 일찌감치 중국을 대표하는 세계적 거장에서 대작 상업영화 장인으로 변신했지만, 최근에도 종종 과거 그의 출세작처럼 중국 근현대사의 격변을 배경으로 한 휴머니즘 성격이 강한 작품도 만들고 있다. 2014년작 <5일의 마중>에 이어 작년에 개봉한 <1초(一秒鐘)>는 둘 다 한국어판도 출간된 옌거링의 소설 <나의 할아버지가 탈옥한 이야기>를 원작으로 한다. 영화나 원작 모두 가족 사랑과 인간 성정의 다채로운 면모에 대한 고찰이라는 주제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옌거링에게는 청소년기와 겹치는 문화대혁명 기간 10여년의 군복무, 중월전쟁 종군기자 참전 등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40여편의 작품이 있는데 작년에는 김일성의 빨치산 신화도 탄생시킨 동북항일연군을 소재로 장편소설 <666호>를 발표했다. 만주지역의 혹한과 굶주림 속에 관동군과 맞서 유격전을 벌이며 초인적인 투쟁을 펼친 이들의 모습은 한반도 출신 독립군의 고난도 연상하게 한다. 동북항일연군의 지도자로 오인돼 체포된 한 삼류 유랑극단 배우가 수인번호 666호와 함께 원치 않게 얻은 지도자의 아우라를 옥중에서 발휘하는 과정에 스스로 감화돼 대규모 탈옥을 지휘한 후 가짜 영웅으로 죽음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다. 숭고한 가치가 비루한 인간을 변화시켜 대의를 위해 희생한다는 주선율처럼 들리지만, 결론에 반전이 있다. 그의 죽음 덕에 항일혁명의 영웅으로 28년이나 더 살아남은 진짜 장군은 문혁 시기에 주자파로 몰려 불명예스럽게 생을 마감한다.

최근 토론토 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갈채를 받은 <1초>를 보고 한 서구 평론가는 주선율 프레임 속에 갇힌 중국 시민들이 선택한 시대정신은 가족에 대한 애착이라고 평한다. 장이머우나 옌거링 같은 중국 장년 세대들의 정부를 향한 대구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국가와 가족 사이에서 방황할 수밖에 없는 중국의 젊은 창작자들은 변치 않는 인간의 본성을 곱씹으며 어떻게 새로운 시대정신과 제3의 사회영역을 그려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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