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번역이란? "책 읽다가 급브레이크 밟는 일 없도록 하는 것"

문학수 선임기자

번역의 모험

이희재 지음|교양인|302쪽|1만6800원

30년 넘게 번역을 해온 번역가 이희재씨는 책 <번역의 모험>에서 좋은 번역에 대해 “얼른 와닿지 않거나 모호한 대목 앞에서 독자가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다시 뜻을 살피려고 역주행하는 일이 없도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30년 넘게 번역을 해온 번역가 이희재씨는 책 <번역의 모험>에서 좋은 번역에 대해 “얼른 와닿지 않거나 모호한 대목 앞에서 독자가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다시 뜻을 살피려고 역주행하는 일이 없도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번역서를 읽다 보면 종종 벽에 부딪힌다. ‘이게 무슨 말이지?’라며 납득이 어려워지는 상황에 처하는 것이다. 그럴 때면 앞의 문장들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한번 두번씩 거듭 읽으며 난관을 돌파하려고 시도하게 된다. 그래도 좀체 해독이 불가한 문장들이 없지 않다. 뜻을 다시 살피며 역주행했는데도 도무지 문맥을 이해할 수 없다면 대개 번역을 잘못한 탓이다.

이 책의 저자가 지닌 문제의식이 바로 그것이다. 저자는 책의 서문에서 “문턱이 낮은 한국어를 추구”하는 것을 번역의 요체로 밝힌다. 무슨 뜻인가. “독자가 편히 정주행하도록 돕는” 번역을 일컫는다. 모름지기 번역가라면, “얼른 와닿지 않거나 모호한 대목 앞에서 독자가 급브레이크를 밟거나 다시 뜻을 살피려고 역주행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뜻이다. 난해한 문장들 앞에서 헤맸던 경험이 있는 독자들, 그러다 책읽기를 아예 포기했던 독자들에게는 확 와닿는 말이다.

저자인 번역가 이희재(59)는 영국 런던대학 SOAS(아시아아프리카대학)에서 20년가량 일했다.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한편, 여러 종의 책을 한국어로 번역해 출간했다. 30년 넘는 번역 노정 속에서 <反자본 발전사전> <마음의 진보> <혁명 극장> <히틀러> <헬렌을 위한 경제학> <미완의 시대> <몰입의 종말> <문명의 충돌> 같은 책들을 한국에 소개했다.

이 책은 한국어와 영어를 오랫동안 횡단하며 살아온 저자의 강의록인 셈인데, 경험에서 우러나온 육성의 설득력이 크게 다가온다. “영어와 일본어에 오염되지 않은 번역”에 관해 서술했던 <번역의 탄생> 이후, 12년 만에 다시 펴내는 ‘번역 지침’이다.

어쩌면 저자는 이 기사를 읽으면서 마땅치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는 쉼표가 없는 문장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두 11개 장으로 이뤄진 책에서 첫 장의 주제가 ‘쉼표’이다. 그만큼 쉼표의 남발을 심각한 문제로 바라본다는 뜻이다. 저자에 따르면 쉼표는 기독교에서 발원한 문장 습관이다. 기독교 이전의 서구에서는 쉼표 같은 문장부호를 사용하지 않았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는 글보다 말이 먼저였던 사회였다. 글을 읽을 때도 묵독이 아니라 낭송을 지향했다. 리듬을 타고 노래처럼 읽었다. “로마 시대로 내려와서도 사정은 비슷”했다. 하지만 기독교는 달랐다. “신의 말을 정확하게 옮겨야 한다고 믿었으므로 오해의 여지가 없도록 글을 정확하게 쓰려 했으며, 6세기가 되면 기독교 (관련 책의) 저자는 본인의 책을 쓰면서 문장부호를 써넣기 시작했다.”

저자는 쉼표까지 그대로 살리는 번역의 영향을 받아 한국어 문장을 쓸 때도 기계적으로 쉼표를 찍는 경우가 많아진 현실을 지적하면서 “쉼표를 아끼라”고 조언한다. 물론 쉼표 없이 의미를 정확하게 전하는 일이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 하지만 그것이 한국어의 원래 모습이다. 잘 쓴 문장은 쉼표 없이 부드럽게 흘러가야 한다. 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였던 키케로도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문장부호에 기대지 말고 글 자체의 짜임새와 리듬으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쉼표를 찍는 바람에 오히려 뜻이 모호해지는” 사례까지 언급하면서 “말하듯이 글을 써야 한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처럼 써야 한다”고 조언한다.

좋은 번역이란? "책 읽다가 급브레이크 밟는 일 없도록 하는 것"

2장과 3장에서는 가까이 있어야 할 말을 모으고 멀리 있어야 할 말을 떼어놓으라고 권고한다. 문장의 모호함을 없애기 위해서다. ‘흘려보내기’라는 제목의 4장은 다소 논란의 여지를 남긴다. 저자의 입장은 ‘원문을 죽여야 원문이 사는 역설의 번역론’이라는 부제에서도 드러나듯 “원문을 그대로 살리기보다는 살릴 것은 살리고 흘려보낼 것은 흘려보내라”는 것이다. 그런데 번역서를 손에 든 독자는 더도 덜도 말고 원문을 정확하게 옮겨줄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을 “강박관념”이라고 하면서 “번역자가 사소한 대목까지 있는 그대로 옮겨놓으면 독자가 고통스러워진다”고 말한다. 원문에 얽매이지 말아야 오히려 원문을 살릴 수 있다는 역설을 펼친다.

이어지는 챕터의 소제목들이 은근히 구미를 당긴다. ‘맞추기’ ‘낮추기’ ‘살리기’ ‘사이시옷’ ‘띄어쓰기’ ‘번역가와 문장가’ ‘사전편찬자 되기’ 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것은 번역을 대하는 저자의 관점일 터이다. 30년 넘는 번역자의 삶에서 마침내 도달한 ‘어떤 지점’을 유추할 수 있는 문장들이 책의 곳곳에 등장한다. 일단 저자는 그리스적 가치관과 알파벳을 동경한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렇다. “그리스인들은 글자를 하찮게 여겼다. 글자는 사람의 생각이나 말을 에누리 없이 담아내는 도구일 뿐이라고 여겼다. 글의 문턱을 낮춰 누구나 자기 생각을 글로 나타내는 것을 장려했기에 다양한 작자가 나왔다. 화려한 문명을 낳은 것은 어떤 소리도 담아낼 수 있는 그리스 알파벳의 독보성이었다고 고전학자 콜린 웰스는 단언한다.”

이 관점은 곧바로 한국어에 대한 언급으로 이어진다. 저자는 콜린 웰스가 “그리스 알파벳을 넘어서는 유일한 글자가 한글이었다고 말했다”면서, “그리스에서는 화려한 문명이 꽃피었는데 조선에서는 왜 그러지 못했는가?”라고 자문한다. 이어서 답한다. “조선의 엘리트 집단이 한문을 신비롭게 포장해 숭상하면서 한글을 억눌러서였다. 조선의 다수 문필가는 글을 포용의 수단이 아니라 배제의 수단으로 삼았다. 어젠다, 미장센, 톨레랑스 같은 말을 마구 뿌려대는 지금의 한국 문필가도 조선의 한문 숭상주의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결국 글의 문턱을 높여 스스로 도취하지 말라는 얘기다. 글을 쓰면서 공연히 ‘폼’ 잡지 말라는 뜻이다. “문턱을 낮추자”는 저자의 메시지는 이런 맥락을 품고 있다.


Today`s HOT
러시아 미사일 공격에 연기 내뿜는 우크라 아파트 인도 44일 총선 시작 주유엔 대사와 회담하는 기시다 총리 뼈대만 남은 덴마크 옛 증권거래소
수상 생존 훈련하는 대만 공군 장병들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불법 집회
폭우로 침수된 두바이 거리 인도네시아 루앙 화산 폭발
인도 라마 나바미 축제 한화 류현진 100승 도전 전통 의상 입은 야지디 소녀들 시드니 쇼핑몰에 붙어있는 검은 리본
경향신문 회원을 위한 서비스입니다

경향신문 회원이 되시면 다양하고 풍부한 콘텐츠를 즐기실 수 있습니다.

  • 퀴즈
    풀기
  • 뉴스플리
  • 기사
    응원하기
  • 인스피아
    전문읽기
  • 회원
    혜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