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에서 '다름'이 멸종되지 않기를… 천선란 '나인'

김지혜 기자

나인

천선란 지음 | 창비 | 428쪽 | 1만5000원

천선란은 새 장편 <나인>에서 힘차고 끈질긴 선의로 세상 모든 ‘다른 것’들을 끌어안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렸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제공.

천선란은 새 장편 <나인>에서 힘차고 끈질긴 선의로 세상 모든 ‘다른 것’들을 끌어안는 아이들의 성장기를 그렸다. 블러썸크리에이티브 제공.

“만약에 내가 인간이 아니고 식물이라면 어때? 그니까 인간이기는 한데 식물인 거야.” 단짝에게 이런 질문을 받은 10대들은 보통 어떤 표정을 지을까. 미래의 경우 건조하고 친절했다. “나무? 꽃? 아니면 꽃 피는 나무? 선인장?” 비밀은 만들지 않기로 약속했는데, 나인은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식물의 목소리가 들리고 손톱 사이에선 새싹이 돋아난다. 알고 보니 내가 다른 행성에서 온 외계인이라 그렇다. 나는 무나 고구마처럼 땅에서 쑥 뽑아낸 아기였다. 열일곱의 어느날, 청천벽력처럼 찾아온 낯선 진실 앞에서 나인과 친구들은 어떤 선택을 해나갈까. 천선란의 새 장편소설 <나인>은 힘차고 끈질긴 선의로 세상 모든 ‘다른 것’들을 끌어안는 아이들의 황홀한 성장기다.

나인에게는 미래 말고도 단짝이 한 명 더 있다. 이름은 현재, 특징은 잘 운다는 것. 세 친구의 인연은 고백 아닌 고백과 함께 시작됐다. 미래는 엄마의 애인이 여자라고 했다. 나인은 이모랑 단둘이 살고 엄마 아빠의 얼굴도 모른다 했다. 현재는 가끔 무서워서 누나랑 같이 잔다. 전작 <천 개의 파랑>에서 실수로 태어난 로봇, 수명이 다한 경주마 등 상처 입은 이들의 서사를 그린 천선란은 이번에도 통념 속 정상의 기준을 조금씩 비켜가는 아이들의 얼굴을 비춘다. 스스로도 오랫동안 알지 못했지만, 나인은 이 중에서도 유독 별난 존재다. 식물과 소통하며, 온 숲을 파란빛으로 밝힐 줄 아는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다. 그의 종족은 풀 한 포기 자랄 수 없게 된 고향 행성을 떠나 지구로 왔다.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엔 “실종된 선배”가 있다. 2년 전, 박원우란 학생이 자취를 감췄다. 경찰은 단순 가출로 처리했다. 아버지는 홀로 전단을 붙이고 다니며 슬픔을 삼켰다. 나인은 나무와 산으로부터 원우와 관련된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는” 진실을 듣게 된다. 원우는 외계인을 믿었다. 엄마가 없었고, 신도시 내 미개발 지역에 살았다. “공부를 잘하거나 미스터리한 일을 많이 알고 있다거나 모험심이 강한 애”로 불릴 수 있었지만, 결국엔 “모자란 애” 취급을 받았다. “안다는 이유로, 무언가를 좋아한다는 이유로, 세상이 믿지 않는 걸 믿는다는 이유로, 허락되지 않은 걸 탐한다는 이유로” 원우는 세상에서 사라졌다.

지구에서 '다름'이 멸종되지 않기를… 천선란 '나인'

판타지와 함께 추리와 서스펜스의 장르 문법이 동원되지만, 실종을 둘러싼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은 그다지 어렵지 않게 그려진다. 소설이 강조하는 것은 은폐된 진실의 실체보다는 그 실체에 다가가려는 아이들의 용기와 선의이기 때문이다. 무시하면 평온해질, 무시하지 않으면 곤란해질 수도 있는 진실을 향해 이들이 기어코 손을 뻗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 선배는 세상에 딱 저 선배 하난데 사라졌잖아.” 나인에게 멸종은 꼭 종족 단위의 개념이 아니다. 한 사람의 생은 곧 하나의 우주라는 것을, 그는 배우지도 않고 체득했다.

책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가 한 인생을 존재하게 한다”. 쉽게 이해받지 못하는 이들은, 한 인생을 존재하게 하는 ‘이해’의 힘을 누구보다 잘 안다. 이모랑 단둘이 살며 “시선으로 받은 상처는 나을 방도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된 나인. 다른 행성에 숨어든 이방인으로 “발밑이 아주 희미하게 떠 있는” “이질감, 낯섦, 생경함, 피곤함”을 견디며 살아온 이모. 한부모가정부터 성소수자까지 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소설 속 인물들은 남들과 다르다는 이유로 상처받는 일에 이골이 났다. 그 상처들은 이제 세상 모든 ‘다른 것’들을 껴안는 능력으로 되살아난다.

“우리는 그냥 딱 보면 알아. 아, 쟤도 바깥에서 왔구나. 신호등이 깜박일 때 걷지 않는 사람들 있잖아. 버스를 탈 때 노인이나 아이를 위해 한발 양보하거나 지하철에서 사람이 다 내려야만 타는 사람. 이상하리만치 느긋하게 질서를 지키는 사람들, 그 사람들이 외계인이야.” 이모가 지구에서 외계인을 알아보는 방법은 간단하다. 인간이 정한 규칙을 철저하게 지키는 이들에게선 ‘외부인’의 냄새가 난다. 눈밖에 나지 않기 위해, 비슷한 처지의 약자들을 돕기 위해 외부인들은 자신도 모르게 ‘선의’를 체득해간다. 그런 의미에서 <나인>은 선의를 무기로 하는 ‘히어로물’이다. 소리 없이 인간의 폭력을 감당해온 식물들과 모든 별종을 대표하는 외계인이 한 팀을 이룬 ‘어벤져스’랄까.

어떤 식물이든 찬란하게 되살리는 이모의 화원 ‘브로멜리아드’는 공장 폐기물에 절어 “죽은 땅”으로 불리던 곳에 세워졌다. 나인의 이름이 나인인 것은 아홉개의 새싹 중 가장 늦게 핀 싹이라 그렇다. <나인>은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기적 같은 이야기이다. 차별과 혐오의 목소리는 그칠 줄을 모르는데, 이를 금지하는 법 제정 논의는 자꾸만 좌초되는 시절이다. 소설도 “어떤 일은, 죽음은, 억울함은, 호소는 한없이 뒤로 밀리고 밀려 세상 밖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럼에도 이렇게 덧붙이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것도 알게 됐으면 좋겠다. 세상 밖으로 밀려나는 건 온몸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한 명이 막는 것보단 여러 명이 막는 게 좋다는 것, 무른 흙도 밀리고 밀리다 보면 어느 순간 아주 단단해진다는 것”. 소설은 그렇게 용기를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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