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전 대법관 “독서는 ‘현실 도피’ 아닌 ‘거짓으로부터의 도피’”읽음

김지혜 기자
<시절의 독서>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은 독서의 효용을 묻는 질문에 “미지의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책 읽기이고 진정한 산책이고 진정한 헤맴”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을 인용하며 “쓸모 없는 것이 쓸모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몰랐던 것에 부딪쳐 진정한 상상력의 세계로 발디딜 수 있다”고 답했다.  이석우 기자

<시절의 독서>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은 독서의 효용을 묻는 질문에 “미지의 어둠 속으로 가는 것이 진정한 책 읽기이고 진정한 산책이고 진정한 헤맴”이라는 버지니아 울프의 문장을 인용하며 “쓸모 없는 것이 쓸모다. 독서를 통해 우리는 몰랐던 것에 부딪쳐 진정한 상상력의 세계로 발디딜 수 있다”고 답했다. 이석우 기자

김영란 전 대법관(65)은 종종 생각한다. 1987년 6월 민주항쟁 당시 나는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나. 부산 지역 최초의 여성 판사로 일하고 있었다. 남편과 떨어져 홀로 아이들을 키웠다. 퇴근하는 길은 온통 최루탄 연기로 가득했다. 판사로서도 엄마로서도 뒤처지고 싶지 않아 고투하던 나날이었지만, 역동하는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내 문제를 고민하고 있어야 하는 상황이 답답했다. “세상은 떠들썩한데 판사를 하며 권력만 누리며 살지 않았나” 하는 질문을 한번도 놓았던 적이 없다.

“시대의 상처죠. 저만 유별나서 그런 것 아니잖아요.” 유일한 취미인 독서는 그가 상처를 극복하는 방법이었다. 위안을 얻기 위해 “상상력으로 구축한 세계를 훔쳐보는 일”, 즉 독서가 현실도피일지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책은 그 앞에 또 다른 답을 내어줬다. “독서는 ‘거짓으로의 도피’가 아닌 ‘거짓으로부터의 도피’고, ‘보다 생생한 세계를, 격렬한 현실의 존재를 확립하고자 하는 것’(어슐러 K 르 귄)이라더군요. 책을 통해 우리는 정확하게 현실을 바라보고 새로운 현실을 상상해 나아갈 수 있어요. 그렇게 제 삶을 해명하며, 책에서 답을 찾아나가는 과정들에 대한 책입니다.”

최근 독서 에세이 <시절의 독서>를 펴낸 김 전 대법관을 지난 5일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김 전 대법관의 삶을 구성했던 독서의 경로에 따라 문학 작품들을 선정해 이에 대한 비평과 분석, 사색을 담아낸 책이다. 소문난 다독가인 그는 어린 시절 탐독한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부터 버지니아 울프와 도리스 레싱을 거쳐 프란츠 카프카와 밀란 쿤데라, 커트 보니것에 이르기까지 10명의 작가와 작품들 사이로 자신의 삶과 고민의 궤적을 풀어 놓는다. 그는 “특히 일하는 여성들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삶의 경로를 염두에 뒀다”고 말했다.

김영란 전 대법관 “독서는 ‘현실 도피’ 아닌 ‘거짓으로부터의 도피’”

그는 책에 “어린 시절의 나는 루이자 올컷과 브론테 자매, 버지니아가 세상과 부딪쳐나가는 자신들을 문학적으로 그려낸 글들을 읽는 것으로 상처에 대한 치유를 받으려고 했다”고 썼다. 책의 절반 이상은 여성 작가들의 삶과 작품을 소개하는 데 할애됐다. 딸이 넷인 집에서 셋째 딸로 자란 어린 시절, “집안의 천사”(버지니아 울프가 ‘여성의 직업’에서 쓴 표현)이자 전문 직업인으로서 이중의 요구를 감당해야 했던 워킹맘으로서의 시간들을 떠올릴 때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이 여성 작가들의 작품이었다. 어려서는 그저 즐겁게 읽었던 <작은 아씨들>이나 <제인 에어>가 성장과 함께 점차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는 “여성의 사회 진출이 거의 불가능했던 시대적 한계를 미묘하게 넘어서보려는 작가들의 노력이 반영돼 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같은 고민을 돌파해온 여성들의 이야기는 곧 위안이 됐다.

한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이자 ‘소수자의 대법관’으로 불리던 법률가로서의 삶을 카프카와 쿤데라의 작품을 통해 돌아보기도 한다. 김 전 대법관은 카프카의 <성>을 읽으며 “정의의 내용이나 제도가 작동하는 원리를 끝까지 사유하지 않고는 정의를 세울 수도 계약을 지켜낼 수도 없는 것이 현실 사회”라는 통찰을 얻는다. 사유 없는 법 해석과 집행을 경계한 것이다. 그는 “기계적인 법과 해석에서 벗어날 방법을 계속해서 고민할 수밖에 없는 곳이 대법원”이라면서 “돌이켜 보니 문학을 즐겨 읽은 것이 사건을 판단하는 데 영향을 미친 듯하다”고 말했다. 재판관은 소설을 읽는 독자와 같은 공감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마사 누스바움의 ‘시적 정의(Poetic Justice)’가 자신도 모르는 새 곁에 와있었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책 <시절의 독서>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우 기자

지난 5일 서울 마포구 한 카페에서 책 <시절의 독서>를 펴낸 김영란 전 대법관. 이석우 기자

<시절의 독서>에서 그는 각각의 문학 작품을 작가의 생애사에서 보이는 상처와 연관지어 해석한다. 올컷과 브론테 자매가 상처 입은 현실과 반대되는 상상의 세계를 지었다면, 동화작가 안데르센은 상징과 은유를 통해 자신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비웃었다. 김 전 대법관에게도 상처가 있다. “1975년에 대학에 입학하자마자 학원민주화 시위로 휴교가 됐죠. 1979년 사법연수원에 다닐 땐 10·26 사건이 있었고요. 항상 학교가 시끄러웠고 학생운동을 하는 친구들이 많았어요. 저는 그런 걸 보며 고시 공부를 하고 있었고…. 제가 상처에 대응하는 방식은 결국 책을 읽으며 이 세상에서 한 발짝 떨어져 세상을 바라보는 것이었어요.”

사춘기 시절 ‘세상에 뛰어들기보다 관찰하는 삶을 살겠다’는 생각을 품었던 그에게 “문학은 세상을 납득하기 위한 도구”였다. “소설을 통해 다른 세상에 가보고 싶다는 욕망, 그곳에서 현재를 제대로 보고 싶다는 마음”을 따라 오랫동안 읽고, 생각하고, 바라본 경험들이 <시절의 독서>에 담겼다. 권위주의 시대에 독서에 탐닉한 것은 그저 회피가 아니었을까 하는 해묵은 자기 의심도 책 곳곳에서 드러난다. 김 전 대법관은 독서의 경로 맨 끝에서 자기 자신과 어려운 화해를 이뤄낸다. 그 시간들은 ‘거짓으로부터의 도피’였으며 더 나은 현실을 보기 위한 방법이었다고, 그는 기나긴 고민 끝에 마침표를 찍는다.

김 전 대법관은 “소설은 삶의 모순에 대한 이야기이고 그 모순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이겨내는 각자의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므로 읽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 치유가 되기도 한다”고 썼다. <시절의 독서>는 문학을 통해 시대의 모순, 그리고 그 시대를 살아간 자기 안의 모순을 직시한 한 독서가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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