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이름으로' 강제된 격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질병, 낙인’

문학수 선임기자

질병, 낙인

김재형 지음|돌베개|480쪽|2만원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은 국가에 의해 격리돼 감시와 통제를 받는 삶을 살았다. 1933년 3월3일 매일신보에 실린 한센병 환자들의 단체사진(맨 왼쪽).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는 신문을 통해 이들의 격리 수용이 효과적이라고 홍보했다.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서는 환자 치료 뿐 아니라 환자를 처벌하기 위해 감옥과 비슷하게 설계된 감금실에 가두기도 했다.(두번째, 세번째) 한센인 격리 지역에서는 강제 낙태가 실시됐고, 이를 피해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1년에 한 번만 부모와 상봉할 수 있었다.(네번째). 돌베개 제공.

한국의 한센병 환자들은 국가에 의해 격리돼 감시와 통제를 받는 삶을 살았다. 1933년 3월3일 매일신보에 실린 한센병 환자들의 단체사진(맨 왼쪽).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는 신문을 통해 이들의 격리 수용이 효과적이라고 홍보했다. 전남 고흥의 소록도에서는 환자 치료 뿐 아니라 환자를 처벌하기 위해 감옥과 비슷하게 설계된 감금실에 가두기도 했다.(두번째, 세번째) 한센인 격리 지역에서는 강제 낙태가 실시됐고, 이를 피해 아이가 태어나더라도 1년에 한 번만 부모와 상봉할 수 있었다.(네번째). 돌베개 제공.

‘문둥병’ 혹은 ‘나병’으로 불렸던 한센병은 역사가 길다. 기원전 중국의 의학서 <황제내경>에서 언급했을 정도다. 중세 유럽에서도 공포의 질병이었다. 17세기에 완전히 사라졌다는 풍문도 있었으나 사실과 달랐다. 서유럽의 몇 나라를 제외하고는 여전히 환자들이 존재했다. 과학적 접근이 이뤄진 것은 19세기 초반 노르웨이에서였다. 당시만 해도 빈곤국이었던 노르웨이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인한 기아에 시달렸고 가난한 농촌을 중심으로 한센병이 확산했다. 환자가 급증하자 국가가 공중보건 차원에서 개입해 ‘과학적 연구’의 서막이 열렸다. 19세기 중반 세 차례에 걸쳐 전국적 역학조사를 실시했고 전문 연구센터인 융거가르드 병원을 설립했다. 당시 연구 책임자였던 다니엘 다니엘센은 1847년 논문에서 “이 질병이 유전병일 가능성이 높다”고 설명했다. 그 결론은 유럽 전역에서 주목받았고,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의 성행위를 금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진일보한 결론은 26년 뒤 나왔다. 30대 초반의 젊은 의사였던 아르메우에르 한센이 환자의 피부에 돌기처럼 생긴 결절에서 떼어낸 조직을 현미경으로 관찰하다가 “특정 박테리아가 환자들에게 공통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한센은 이듬해 발표한 논문에서 이 박테리아를 한센병의 원인균으로 특정했다. ‘한센병’이라는 명칭은 그의 이름에서 온 것이다. 이렇듯 세균에 의한 감염이 밝혀지면서 “격리 제도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주로 가난한 농민들이었던 한센병 환자들은 자신을 강제 격리시키려는 과학의 힘 앞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다.”

저자 김재형은 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부 교수다. ‘몸과 의료, 낙인과 시설’에 관한 연구를 꾸준히 해왔다. 2005년 국가인권위원회에서 실시한 ‘한센인 인권 실태 조사’에 참여하며 한센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왔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의 설명에 따르면 한센병균은 주로 신체 말단의 신경을 공격해 해당 부위의 감각을 잃게 한다. 환자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감각을 상실한 부위에 상처가 생기는데 이 상처는 궤양으로 악화한다. 적절한 치료를 제때 받기 어렵던 시절에는 상처 부위가 썩어 신체 변형을 일으키기도 했고 탈모와 만성피로 등 다양한 증상을 동반하기도 했다.

'과학의 이름으로' 강제된 격리, 아직 끝나지 않았다… ‘질병, 낙인’

책의 초점은 ‘의료의 사회문화사’, 그중에서도 특히 ‘강제 격리’의 문제다. 노르웨이에서 병인이 규명된 이후, 유럽인들은 식민지에서 한센인들의 격리를 강화했다. 예컨대 영국은 아프리카 케이프 지역의 환자들을 케이프타운 항구 건너편의 로벤섬에 격리했다. 넬슨 만델라가 20여년 옥살이했던 그곳은 원래 한센병 격리시설이었다. 저자는 “(유럽인들은) 식민지에서 육지와 분리된 섬으로 (한센인들을) 추방”했다면서, “섬으로 추방된 환자는 스스로 먹을 것을 구해야 했고 체계적인 치료를 받기 어려웠다”고 설명한다. 유럽의 백인 환자들은 이보다는 상황이 나았다. 예컨대 노르웨이는 “환자들을 도시에 있는 시설에 수용”했으며, “지속적인 관리와 치료”를 제공했다.

그렇다면 한반도는 어땠는가. 책에서 가장 많은 분량이 이 부분에 할애돼 있다. 저자의 설명에 따르면 조선 중기까지는 “한센병의 병인을 우주에 떠도는 사악한 기운인 ‘대풍’으로 여겼다”. 1610년 편찬된 <동의보감>에서 “처음으로 전염을 언급했으나, 그것은 풍수와 결합한 유전설에 가까웠다”. 최초의 “서양식 나병원”은 1909년 경남 동래군 서면 감만리에 세워졌다. 미국 북장로교의 지원을 받아서였다. 2년 뒤에는 전남 광주군 효천면 봉선리에도 나병원이 들어섰다. “부랑 한센병 환자 강제 격리”는 1917년부터 시행됐다. 전남 고흥의 끄트머리에 위치한 소록도에 ‘소록도 자혜의원’이 들어서면서였다. 이후 이 병원은 명칭이 일곱 차례 바뀌면서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소록도의 역사’는 치료시설과 죽음의 수용소 사이를 오갔다. 1920년대에는 이 시설이 비록 고립됐으나 치료와 생활 면에서 안정적이었다는 것이 저자의 설명이다. 하지만 1930년대에 “일본의 파시즘과 우생학의 유행”으로 “극한 상황”이 벌어졌다. 당시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한센병 환자들을 남김없이 가둬놓고, 종국에는 절멸”시키려 했으며, 소록도의 시설을 확장하면서 환자들을 노역에 동원했다. “한 해에 수백명이 사망해도 신문에 기사 한 줄 실리지 않았다.” 일본이 패망해 물러간 직후에도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다. “한국인 의사와 직원들 사이에 운영권을 놓고 다툼”이 발생했고, 이 과정에서 환자 84명이 학살됐다.

책에 따르면 1945년 9월 김형태가 원장으로 부임하면서 소록도에 ‘봄’이 왔다. 그는 “소록도를 한센인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여겼다. 초등학교만 있던 소록도에 녹산중학교가 들어섰다. 소록도 사람들은 연극을 연습해 부산과 여수에서도 공연했으며, 환자자치제가 시행되면서 통제가 느슨해진 것을 스스로 염려해 ‘녹산청년동맹’을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봄은 짧았다. 개혁에 불만을 품은 일부 직원들이 정부에 원장이 부정과 착복을 했다는 투서를 하면서 상황은 급반전했다. 새 원장이 부임하고 다시 악화일로를 걸었다. 환자들의 흉골을 드릴로 뚫어 골수를 채취하는 ‘흉골골수 천자 사건’은 소록도의 악몽 가운데 하나로 기록됐다.

저자는 “광복 후에도 한센인들은 일제강점기와 다르지 않은 삶을 살았다”고 말한다. 수용시설은 소록도뿐 아니라 부산, 여수, 대구, 음성에도 있었다. 정부가 1963년 ‘전염병예방법’을 개정하며 “한센병 환자에 대한 강제 격리 조항이 빠지기는 했지만”, “(강제적) 격리주의에 대한 믿음은 그대로 유지됐다”고 한다. 이런 차원에서 그는 “한센인 인권 침해의 과거사가 해결되지 못한”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일본은 2001년 국가의 책임과 보상을 법에 명시했지만 한국은 여전히 답보 상태라는 것이다. 저자는 책을 닫으면서 “100년 넘게 이어져온 한센병 관리 정책의 역사는, 한센병에 걸린 이들의 시민권을 박탈하고 배제하며 격리했던 역사”라고 확언한다. 이런 과거사에 대한 성찰과 더불어, 국가의 반성과 책임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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