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이라는 가능성
윌 버킹엄 지음·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352쪽 | 1만7000원
타인은 지옥이다. 이 문장의 주인 사르트르는 타자의 시선에 얽매인 인간 실존을 말하고 싶었다지만, 지금까지도 이 말이 회자되는 까닭은 타인과의 관계를 고통과 두려움으로 여기는 이들의 유구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나와는 달라보이는, 금방이라도 ‘지옥’으로 변모할 것 같은 낯선 타인들을 경계하고 차단하는 것은 어느새 당연한 일이 됐다. 타자에 대한 혐오가 정치의 언어로 소환되고, 타인과의 접촉이 곧 감염의 경로로 치부되는 요즘, 낯선 이를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한층 더 차갑게 얼어붙었다. 고립이 외로움을 낳고, 외로움이 다시 고립으로 이어지는 단절의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없을까.
<타인이라는 가능성>은 타인에게서 공포와 지옥이 아닌 새로움과 기쁨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책이다. 낯선 이를 환대하고 그와 연결될수록, 우리 삶은 도리어 안전하고 온전해질 수 있음을 풍부한 사례와 논거를 통해 보여준다. 저자 윌 버킹엄은 문학·철학·인류학의 세계를 탐사하는 철학자이자 부지런히 지구를 누벼온 여행자로서 ‘미지의 타자를 환대하는 일’에 관한 다양한 지식과 경험들을 소개한다.
유방암으로 반려자가 세상을 떠난 후 상실에 압도됐던 저자의 이야기가 책의 중요한 축이 된다. 저자는 거리에서 만난 모르는 사람의 포옹, 혹은 미얀마 양곤으로의 갑작스러운 이주 등 낯선 사람과 만나는 상황을 통해 비로소 슬픔의 ‘해독’을 경험했던 사연을 들려준다. 이방인과의 관계 속에서 새로 재구성되는 자신과 미래를 마주했던 기쁨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그의 개인적 체험이 아니라, 다양한 고전문학과 인류학 연구들이 뒷받침하는 오래된 이치임을 주장한다.
낯섦을 무조건 사랑하라는 것이 아니다. 저자는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 ‘제노포비아(xenophobia)’는 “결코 비이성적인 감정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영어에서 환대(hospitality)와 적의(hostility)의 뿌리로 지목되는 고대 어근 ‘hosti-pet’은 이방인(hosti)과 가능성 혹은 힘(pet)의 합성어다. 가능성인지, 힘(위협)인지 알 수 없는 낯선 사람들은 언제나 불확실한 대상이기에 두려운 만큼 궁금하고 매혹적인 존재다. 낯선 사람과 연결되고자 하는 이 욕망을 그리스인들은 ‘필로제니아(philoxenia)’라고 불렀다.
책은 <오딧세이아>와 <신약>, <시경> 등 동서양의 고전 등을 통해 제노포비아만큼이나 필로제니아를 중시해온 인류의 역사와 문화를 망라한다. 고대 문헌 속에서 손님은 행운을 가져다주는, 나아가 신적인 존재로 그려지곤 했다. 기원전 6세기에 쓰인 <창세기>엔 정체 모를 세 이방인을 빵과 우유, 고기로 대접한 아브라함 부부의 이야기가 나온다. 알고 보니 세 이방인은 천사였고, 나이 많은 부부는 뜻밖의 아이를 얻게 된다. ‘집 너머’의 세계를 두려워하는 최근의 도시인들과 달리 인간은 오랫동안 이방인과 낯섦을 사랑해왔다. 인도네시아 망가라이족에게 진정한 보안은 문을 잠그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사람들을 초대해 떠들썩한 시간을 보내는 풍습 ‘리마이(remai)’야말로 삶의 고난과 위험에서 몸을 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앞서 살폈듯, 낯선 이를 무작정 천사로 믿고 융숭히 대접하는 것은 안전하지 못한 선택일 수 있다. 도사린 위험 속에서도 미지의 타자를 환대하려면, 특별한 장치가 필요했하다. 예법과 농담, 선물과 만찬 등의 다양한 풍습과 문화가 그 역할을 한다. 예컨대 몽골에서 주인과 손님의 관계를 규정하는 관습인 ‘요스(yos)’는 얼핏 지나치게 까다롭게 보인다. 손님이 집주인의 게르에 들어설 때에는 오른발부터 디뎌야 한다. 주인집 침대에서는 노래를 해서는 안 된다. 고기 첫입을 먹을 때에는 적은 양을 먹고 넉넉한 것처럼 과장하며 씹어야 한다. 그저 황당한 허례허식처럼 보이지만 요스는 낯선 관계에 신뢰를 형성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정해진 예법을 이행하는 서로를 확인하는 과정 속에서 의심이 불식되는 것이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타인을 믿고 환대하기 위해 애써온 문명의 흔적을 좇다보면, 공동체를 위협하는 편견과 증오로 굳어진 제노포비아의 현실이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하지만 꼭 문헌을 헤집지 않더라도,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환대의 실천은 여전히 있다. 도널드 트럼프 집권 이후 인종차별 범죄가 급증하자, 파키스탄 출신 미국인 소녀 유스라의 가족은 매주 교차로에 나가 모르는 사람을 식사에 초대하는 캠페인을 벌인다. 시리아 난민 가족을 자신의 집에 무료로 묵게 한 그리스인 엘레니는 그렇게 하는 이유를 묻자 이렇게 말한다.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는 것이죠. 내가 살고 싶은 세상이 어떤 세상인지 생각해보는 것이고요. 제가 특히 너그러운 사람인 건 아니에요. 연결되었다는 느낌 때문에 순전히 인간적인 측면에서 기분이 좋아지는 거죠. 이건 정말 연결의 문제예요. 이 연결이 나를 어디로 데려갈지 누가 알겠어요.”
이방인에게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들 역시 낯섦이 두렵지 않을 리 없다. 그럼에도 ‘내가 살기 원하는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욕망과 기대 때문에, 기꺼이 한발 나아가 낯섦을 만나는 것이다. 오랜 고립을 떨치고 나설 동기와 이유를 마련하는 책이다. 저자는 코로나19의 상황을 언급하며 책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문을 걸어 잠가야 하는 지금이야말로 삶을 축소하려는 유혹에 저항하고 이방인이 가져다줄 수 있는 미래를 상기해야 한다. (…) 폭풍이 지나갔을 때 문을 활짝 열고, 다시 연결되고, 서로를 껴안고, 살 가치가 있는 세상을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