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삶

치료받아야 할 것은 바로 '현대 의료'다

김지혜 기자

병든 의료

셰이머스 오마호니 지음·권호장 옮김 | 사월의책 | 344쪽 | 1만8000원

[책과 삶] 치료받아야 할 것은 바로 '현대 의료'다

“치료받아야 할 것은 환자가 아니라 현대 의료 자체다.”

영국과 아일랜드에서 활동하는 소화기내과 전문의 셰이머스 오마호니는 책 <병든 의료>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사로서 현대 의료에 대한 비판과 공공의료의 회복에 대한 글을 꾸준히 기고해온 그에게 이 시대 ‘새로운 종교’가 된 의학은 삶과 죽음 자체를 의료화하고, 사람들에게 혜택보다 해를 더 많이 끼치는 문제적 대상이다. 현장 치료보다는 연구 실적에만 골몰하는 거대과학, 새로운 질병을 만들어 복지 재원을 탕진하는 의료계, 무의미한 신약을 끊임없이 출시하는 의산 복합체 등을 원인으로 지적한다.저자는 <병원이 병을 만든다> 등의 저서를 통해 의료 기술의 확충 또는 의료 제도의 확대가 사람들의 건강을 증진시킨다는 환상을 지적한 오스트리아 태생 사상가 이반 일리치에게 큰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는 일리치의 비판적 관점에 자신의 경험과 최근 의료계의 경향을 덧붙여 한 권의 우아한 고발장을 완성했다. 35년간 3개 국가의 병원에서 일하며 직접 겪고 목격한 현대 의학의 부조리를 낱낱이 폭로하면서도, 사회적 불평등과 인간에 대한 연민을 회복하는 현대 의료에 대한 바람을 진심 어린 목소리로 담아냈다.

“우리는 건강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 이런 건강 수준은 대부분의 인류 역사에서 경험하지 못한 사치이다.”

첫 장 ‘요즘엔 사람들이 너무 오래 산다’는 이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20세기 초반 일어난 의학의 혁명적 발전 덕분이었다. 1885년에서 1985년 사이 미국과 유럽의 영아사망률은 1000명당 140명(출생아 7명 중 1명 사망)에서 5명(200명 중 1명 사망)으로 급격히 떨어졌다. 기대수명은 50세에서 거의 80세로 늘어났다. 결핵·파상풍·매독·폐렴·소아마비·천연두 등 한때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던 질병 중 다수가 사라졌다. 193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의학의 황금시대’가 해낸 일이었다.

[책과 삶] 치료받아야 할 것은 바로 '현대 의료'다

연구 실적에 골몰하는 ‘거대과학’
상업적 이유로 없는 병을 만들고
복지재원 탕진하는 의료계


1980년 의사면허를 딴 저자는 “전문가로서의 나의 삶은 황금시대의 마지막이자 충족될 수 없는 비현실적 기대와 실망의 시대의 도입부에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높아진 의학에 대한 기대치와 의존도는 거대한 의산 복합체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의산 복합체는 ‘전통적인 악당’으로 거론되는 거대 제약회사뿐 아니라 의료기 제조업·건강식품 산업·의과대학·보험회사·로비스트 등 다양한 이익 집단의 영합을 의미한다. 저자는 “환자, 의사, 그리고 크게는 우리 사회 전체가 의산복합체의 희생자이자 봉이자 노예가 되었다”고 비판하며 “우리는 치료하고 때로는 과잉 치료하지만 치유하지는 않는다”는 통렬한 고백을 이어나간다.

그의 비판은 의학의 마땅한 ‘짝’으로 여겨진 과학과 연구 분야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저자는 물리학자 앨린 와인버그가 처음 쓴 ‘거대과학’이라는 용어를 빌려온다. “실험실을 기반으로, 풍족한 연구비를 쓰면서, 보통은 대학 연구소와 같은 대형 기관에서, 반(半)봉건적인 학술 관료의 감독을 받으면서 수행하는 연구”를 의미하는 거대과학을 두고 저자는 “실제 환자에게 이익이 되는지는 이전 황금시대에 견주어보면 그저 그렇거나 대단할 것도 없다”고 비판한다.

사망에 이르는 질병 대부분이 거대과학이 찾아내려 하는 “신체의 기계적 결함”이 아닌 노화와 빈곤, 장애, 취약한 생활환경 등으로 인한 “엿 같은 인생 증후군”에서 발생하기 때문이다. 물론 의학 연구는 현대 의학 발전의 중요한 토대이겠으나 다수의 논문들이 연구비 지원, 학위 취득과 승진, 논문 게재편수 늘리기 등의 이유로 쓰인다는 현실을 돌아볼 때 거대 과학이 실제 환자의 치료에 미치는 기여는 미미하다는 이야기다.

근거기반의학, 원격의료, 디지털헬스 등 오늘날 의학계에 나타난 새로운 경향에 대해서도 비판의 날을 세운다. ‘무작위 대조시험’ 등 실제 실험을 통해 얻어진 근거를 기초해 치료와 약물의 효능을 결정하는 근거기반의학의 경우 1990년대 이후 “의학의 새로운 청량제”라는 칭송을 받으며 정통과학의 위치를 차지하게 됐다. 문제는 여기서 근거를 도출하는 임상시험과 연구의 주도권을 대형 제약회사가 쥐면서부터 시작된다.

저자는 1998년 뉴잉글랜드의학저널에 발표된 콜레스테롤을 낮추는 약 프라바스타틴에 대한 연구를 인용한다. 연구자들은 환자 9000명을 프라바스타틴군과 위약군으로 나누어 6년 동안 추적 조사한 결과, 6.1년 동안 프라바스타틴 복용 환자군으로 무작위 배정된 1000명 중 48명이 예방효과를 본 것으로 추정했다. 하지만 저자는 이 결과를 ‘필요치료수(NNT)’의 개념으로 다시 해석한다. 그는 “1000명 중 48명이 효과를 본 것이라면, 나쁜 결과 1명을 예방하기 위해 21명이 6년 동안 약을 복용했고 그럼에도 21명 중 20명은 아무런 효과도 보지 못했다는 얘기가 된다”고 해석한다. 근거기반의학은 우리 다수에게 예방을 명목으로 의미 없는 약물을 강요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한 저자는 “근거기반의학은 여러 만성질환을 동시에 가진 취약한 노령인구로 인구 구성이 옮겨가고 있는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다”는 앨버 파인스타인의 주장을 인용한다. 근거가 되는 데이터들은 대개 한 가지 질환을 가진 젊은 환자들에게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책에 따르면 미국 60대 인구 25% , 70대 인구 46%가 5개 이상의 약물을 복용하고 있고 요양원에 있는 경우 91%로 그 비율이 높아지는데, 이 약물 사용을 지지하는 근거들은 노인 환자들이 아닌 젊고 건강한 사람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책과 삶] 치료받아야 할 것은 바로 '현대 의료'다

노화와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
질병 정복 장담하지만 말고
환자 고통을 줄이고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데 집중하라

“모두가 일주일만이라도 글루텐을 피하려고 노력해보자. 그러면 피부와 신체적, 정신적 건강이 놀랍도록 변화될 것이고, 옛날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것이다!” 팝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의 트윗이다.

저자는 의료계가 ‘비셀리악 글루텐 과민증’이라는 없는 병을 만드는 과정 속에서 시장과 대중이 어떤 영향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면밀하게 분석했다. 사이러스의 트윗처럼 글루텐은 마치 ‘만악의 근원’인 것처럼 다수의 대중에게 받아들여졌다. 저자는 2014년 미국에서 글루텐프리 식품의 매출액은 약 112억달러였고, 2020년에는 약 239억달러의 시장으로 성장할 것으로 예측됐다고 한다.

문제는 “인구 중 셀리악병을 가진 1%를 제외하면 글루텐이 유해하다는 근거는 없다”는 데 있다. 셀리악병은 유전적 소인이 있는 사람이 글루텐을 잘 소화시키지 못해 발병하는 병이다. 그러나 2011년 2월, 전 세계에서 런던으로 모인 셀리악병 연구자 15명은 “글루텐프리 식이를 하는 사람의 숫자가 셀리악병 환자 추정치보다 훨씬 많”으며 “글루텐프리 제품 시장은 전 세계적으로 2010년 기준 25억달러에 이른다”는 상업적 이유로 ‘비셀리악 글루텐 과민증’이라는 질병에 공식적으로 ‘합의’한다. 셀리악병이 아니더라도 글루텐에 과민한 반응을 나타낼 수 있다는 것이다. 빈약하기 짝이 없는 연구와 결과들이 이를 겨우 뒷받침했음에도 말이다.

이후에도 셀리악병과 글루텐에 대한 논문은 수없이 쏟아져나왔다. 셀리악병을 글루텐을 먹지 않으면 걸리지 않고, 셀리악병이 아니면 글루텐을 먹어도 상관없다는 단순한 진리는 쉽게 무시됐다.

이밖에 병원의 성과를 정량적 평가로만 측정하는 경영관리주의, 치료의 권리를 소비자의 권리로 바꾸어놓은 소비자주의 등으로 인해 현대 의료 산업에서 치료에 열중하고자 하는 의사들 또한 곤란에 처하고 있는 현실들도 지적한다.

저자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는 인간의 질병을 과학과 산업이 기계적으로 추적해 제거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노화와 죽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며, 의료는 우리 삶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기에 공공재로서 모두에게 공평하게 배분돼야 하는 것이다. 질병은 정복하겠다고 장담하기보다 고통을 완화하며 남은 삶을 사랑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의료의 목적일 것이다. 저자는 책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끝맺는다. “아마도 오늘날 의학이 해야 할 일은 모든 인간의 삶의 조건을 어디에서나 좀 더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드는 사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리라. 이것이 의학의 존재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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