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시대, 인문학을 ‘새로고침’하다

김지혜 기자

‘새로운 세대의 시각’ 담은 ‘탐구’ 시리즈 편집자와 연구자들 대담

삶과 밀착된 현실 문제 사유, 학계 울타리 벗어나 현장과 소통

민음사 ‘탐구 시리즈’ 저자와 편집자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 편집국에서 만나 대담했다. 왼쪽부터 대담의 사회를 맡은 신새벽 편집자, <철학책 독서모임> 저자 박동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저자 임소연,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저자 윤아랑./우철훈 선임기자

민음사 ‘탐구 시리즈’ 저자와 편집자가 지난달 28일 서울 중구 경향신문사 편집국에서 만나 대담했다. 왼쪽부터 대담의 사회를 맡은 신새벽 편집자, <철학책 독서모임> 저자 박동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 저자 임소연,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저자 윤아랑./우철훈 선임기자

위기의 시대다. 경기 침체, 기후·식량 위기, 젠더·정치·세대 갈등은 어느덧 보통의 삶에 밀착한 현실의 문제가 됐다. 세계를 향한 관점과 사유, 행동 방식의 ‘새로고침’이 절실한 때다. 인문총서 ‘탐구’ 시리즈의 저자와 편집진은 ‘인문학’에서 작금의 위기와 함께 살아가는 법을 고심했다.

탐구 시리즈는 민음사 인문잡지 ‘한편’의 편집진이 주도한 기획으로, 학계의 젊은 연구자들이 출간 전 동료 평가와 독자 세미나 등 지식 생산 협업을 거쳐 총서를 출판한다. 총 10권으로 기획된 탐구의 첫 책으로 사월의책 편집장 박동수의 <철학책 독서 모임>, 비평가 윤아랑의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 과학기술학자 임소연의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이 최근 출간됐다. 지난달 28일 경향신문사에서 세 저자와 신새벽 편집자가 만나, 위기의 시대를 맞아 이들이 ‘새로고침’한 인문학의 현재를 논하는 대담을 펼쳤다.

민음사 ‘탐구 시리즈’ 의 편집자 신새벽. /우철훈 선임기자

민음사 ‘탐구 시리즈’ 의 편집자 신새벽. /우철훈 선임기자

각각 철학, 문화 비평, 과학기술학으로 분야는 다르지만 저자들은 모두 “이미 옳다고 정해진 가치가 아닌, 현장에서 마주한 세계를 직접 사유하는” 학문후속세대를 자임한다. “더 연결된 인문학이 더 튼튼하다”(박동수)는 설명처럼, 이들이 생산하는 인문학은 동료 연구자뿐 아니라 대중과의 협력을 통해 공부와 삶, 학문과 현장을 잇는 새로운 장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 탐구 시리즈는 “새로운 세계를 보는 새로운 세대의 시각”을 슬로건으로 내세웠다. 각자의 인문학 분야에서 ‘새로운 세대’란 이전 세대와 어떻게 구분되는가.

박동수(이하 박) = (인문사회과학 출판 분야에서 보면) 기성 세대는 ‘이미 옳은 것’에서 시작해 사회를 평가했다. 세상을 새롭게 만들어내는, 혁명적이지만 동시에 공허한 제스처에 집중했다. 반면 지금의 세대는 주어진 세상 속에서 어떤 것을 쇄신하고 유지할 것인지 하나하나 세밀하게 따져보려고 한다. (이와 동반된) ‘소수 천재의 시대’에서 ‘다수의 직업인(연구자)의 시대’로의 흐름 속에서 동맹과 협력의 가치가 중요해졌다.

임소연(이하 임) = 과학기술학계 역시 비슷하다. 이전 세대는 과학기술과 민주주의를 연결하는 논의들, 예컨대 사회가 과학기술을 어떻게 통제할 것인지 등에 집중하는 것을 마땅히 옳은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새로운 세대의 연구자는 정해진 가치관을 따르기보다, 현장을 중시하고 그 속에서 함께 변화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철학책 독서모임> 저자 박동수. | 우철훈 선임기자

<철학책 독서모임> 저자 박동수. | 우철훈 선임기자

윤아랑(이하 윤) = 문화 비평 분야에선 걸작을 따지는 데 얽매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차이가 드러난다. 정전을 목록화하려는 시도보다,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맥락에 집중한다. 영국 드라마 <닥터 후>의 ‘오프닝 시그널’에만 천착해 일렉트로닉 사운드의 수용 과정에 집중한 비평이 일례가 될 수 있다.

- 책의 초고 작성 단계에서 동료 평가, 일반 독자 대상의 사전 세미나를 거쳤다. 학계 아닌 출판계에서 분과 학문이 각기 다른 저자들이 동료 평가·세미나 등 협업을 통해 책을 출간한 것은 이례적이다.

박 = 국내 출판계에선 사상 처음으로 시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책의 원고를 절반쯤 썼을 때 독자 대상 사전 세미나 ‘탐구 춘계 학술대회’에 참여했다. 임소연 작가의 책은 과학과 여성을 주제로 하고, 제 책은 현 시대를 사유케 하는 오늘의 철학에 대한 것이다. 다른 주제, 분야의 저자 두 사람이 함께 세미나를 갖는다는 것이 처음엔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의외로 통하는 주제가 적지 않았다. 다양한 타자들의 교류 공간인 ‘만남 구역’이 대표적이다.

임 = 저 역시 신기한 경험이었다. 학계에서 주로 활동해온 터라 연구자들만 참여하는 폐쇄적이고 형식적인 분위기의 학회에 익숙했다. 이번 세미나는 일반 독자를 청중으로 갖고서도 ‘학술대회’라는 이름을 붙였다는 점에서 해방감을 느꼈다. 기존 학회의 권위가 깨진 속에서 저자 간은 물론이고 독자와의 소통도 자유롭게 이뤄졌다. 당시 세미나에서 청중이 질문한 내용들이 후에 책에 반영되기도 했다. 학계 밖에서 젊은 연구자들에 의해 새로운 지식 생산의 현장이 만들어지고 있다는 것을 체감했다.

윤 = 기존의 학회에서 토론은 형식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탐구 시리즈의 동료 평가와 세미나는 서로에 대한 피드백이 실제로 원고에 영향을 미친다는 전제하에 이뤄지다보니 더욱 긴장하면서도 편안하게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의 저자 임소연. 우철훈 선임기자

<신비롭지 않은 여자들>의 저자 임소연. 우철훈 선임기자

- 세 저자가 책에서 공통적으로 다루는 문제 중 하나가 젠더, 정체성이다. 각자 학문을 통해 페미니즘 이슈에 대해 어떻게 개입하려고 했는가.

박 = 철학자 낸시 프레이저는 현 시대를 “비정상적 정의의 시대”라고 정의한다. 과거에는 무엇이 정의로운지에 대한 전제가 공유됐다면 이제는 정의의 내용, 당사자, 방법 모두가 논란이 된다. 페미니즘 역시 마찬가지다. 어떤 진영에서는 보편적 가치로 여기지만 다른 진영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이제는 섣부른 비판과 배제보단 스스로를 의심하며 고쳐가며 연대를 확장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임 = 페미니즘을 둘러싼 갈등에 과학이 더욱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 포용과 연대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먼저 더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트랜스젠더에 대한 사회적 갈등 국면에서, 우리에겐 무엇보다 트랜스젠더에 관해 다양하게 조사된 과학적인 데이터가 필요하다.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저자 윤아랑. 우철훈 선임기자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의 저자 윤아랑. 우철훈 선임기자

- 지금 우리에게 인문학이란.

박 = “더 연결된 과학이 더 튼튼하다”는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말을 빌려, ‘더 연결된 인문학이 더 튼튼하다’고 말하고 싶다. 인문학은 학문적 연구와 대중적 소통이 서로 긴장하고 지탱하는 순환 속에서 풍부해진다. 인문학의 위기는 앞서 잡지, 문예지 등이 수행하던 순환의 중간 단계가 무너짐으로써 발생했다. 학문 최전선의 논의를 대중적 장에 전달하는 작업들이 더 많이 이뤄져야 한다.

임 = 지금까지는 학문 간 장벽 때문에 인문학의 영역에 과학기술이 계속 존재해왔다는 사실이 쉽게 잊혀졌다. 인문학자들이 생태에 대해 논할 때, 그에 앞서 인간 아닌 존재들에 대한 지식을 오랫동안 축적해온 자연과학자와 공학자들이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좋겠다.

윤 = 폭로만으로 완수되지 않는 비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이 나쁘다’ 이후의 실천에 대한 탐구가 필요한 때 같다.

“위기의 시대 인문학 공부하기” 민음사 ‘탐구 시리즈’ /우철훈 선임기자

“위기의 시대 인문학 공부하기” 민음사 ‘탐구 시리즈’ /우철훈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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