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 에르 브르드(Hun er vred).
낯선 덴마크어가 리듬을 타고 흐른다. ‘앵거(Anger·화)’라는 영어를 인용한 단어만 간신히 알아들을 수 있다. 덴마크어는 아주 멀고 낯설다.
하지만 덴마크어로 그가 읊고 있는 내용은 강력하다. 한국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한국 현대사가, 사회 제도와 문화가 낳은 모순과 문제점이 낯선 언어를 통해 파도처럼 덮쳐온다. 낯선 덴마크어가 한국어로 번역됐을 때, 쏟아지는 강력한 언어를 절대 외면할 수 없다. “Hun er verd”는 “여자는 화가 난다”라는 뜻이다.
덴마크로 입양된 한국계 시인 마야 리 랑그바드의 시집 <그 여자는 화가 난다>(난다)가 출간됐다. 책 출간을 기념해 한국을 찾은 랑그바드가 7일 서울 마포구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2007~2010년 3년간 한국에 있을 때 사회운동가·예술가·학자들로 이뤄진 국제적 입양 공동체에 머물면서 입양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얻었어요. 입양과 제국주의가 어떻게 영향을 주고받는지 알았고, 국가 간 힘의 차이가 어떻게 입양산업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알게 됐습니다. 그때의 경험으로 이 책을 썼어요.”
<그 여자는 화가 난다>의 첫 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여자는 자신이 수입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자신이 수출품이었기에 화가 난다./ 여자는 어린이를 입양 보내는 국가는 물론 입양기관도 국가 간 입양을 통해 돈벌이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 한국이 국가 간 입양을 통해 연간 1천500만달러를 벌어들인다는 것을 깨닫고 화가 난다.”
국가 간 입양은 하나의 거대한 산업
덴마크 한국계 입양아인 시인이 쏟아내는 불평등과 차별에 관한 날카로운 분노
3년간 한국에서 다양한 입양아들 만나며 이 책을 쓰게 돼
책은 ‘화’로 가득 차 있다. 그 분노는 자신을 버린 친부모와 입양이 문제인 줄 모르는 백인들을 향하기도 하고, 자신을 향하기도 한다. 종내에는 국가 간 입양이라는 하나의 산업 체계, 비혼모나 싱글맘을 위한 사회적·재정적 지원이 부족한 사회를 향해 나아간다.
랑그바드는 “입양인으로서 늘 일상 속에 감사해야 한다고 요구받았다. 입양이 아니었다면 가난하고 집도 없이 살았을 수도 있으니 감사해야 한다고 했다”며 “입양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체계적인 입양에 대한 신뢰를 잃었다. 친부모를 찾아 모국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사회적이고 정치적인 체계를 맞닥뜨리는 자리이기도 하다는 것을 체험했다”고 말했다.
랑그바드는 2006년 처음 친부모를 만났다. 통역을 해주기로 한 친구가 급한 사정이 생겨 못 오는 바람에 랑그바드와 친부모는 말 한마디 나누지 않고 침묵 속에 삼계탕을 먹었다. 랑그바드는 식사 이후 꼬박 이틀 동안 잠만 잤다. 친부모를 만나는 경험이 그에겐 일종의 ‘트라우마’가 된 것이다. 랑그바드는 친부모와 첫 만남 이후 5년 동안 연락을 할 수 없었다고 했다.
랑그바드의 한국 이름은 이춘복이다. 하지만 그가 아들이 아닌 딸이었기에 그의 이름은 마야 리 랑그바드가 되었다.
“저는 아들이 아닌 딸이란 이유로 입양보내졌어요. 친부모는 이미 딸이 넷이나 있었어요. 6·25전쟁 전후엔 미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 태어난 아이들이 많이 입양됐습니다. 입양의 이유는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데, 지금은 비혼모·싱글맘의 아이들이 입양됩니다. 한국은 저출산 국가이면서 아이를 입양보내는 건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요. 한국은 비혼모나 싱글맘을 지원할 경제력이 있는 부국인데도 말입니다.”
입양아, 동양인, 여성, 퀴어 소수자였던 작가의 삶
비혼모, 싱글맘의 아이들이 입양…입양은 여성인권과 밀접
가족 개념 넓혀 다양성 수용해야
“여자는 병원비 때문에 입양시켰던 미숙에게 화가 난다. (…) 여자는 미혼모들이 아이를 입양시키면 병원비를 무료로 해주겠다는 제안을 공공연하게 받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는 입양 서류에 서명을 하는 미혼모들에게 아동수당을 받을 수 있다는 정보를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는 사실에 화가 난다.”
‘여자’의 분노는 근본적인 사회 제도까지 나아가고, 국제사회의 불평등, 성교육의 미비, 서구적 가치를 맹목적으로 따르는 사회에 대한 분노로 나아간다.
“책을 이끌었던 가장 큰 요소는 분노였습니다. 능동적으로 분노하는 것이 가져오는 생산성이 있어요. 모든 변혁의 시작에는 분노가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건강한 형태의 분노에서 가져올 수 있는 변화의 불씨가 있다고 생각해요.”
랑그바드는 “입양은 젠더 이슈이자 페미니즘 이슈이기도 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여성 인권과 입양은 관계가 깊다. 비혼모·싱글맘이 사회적 차별과 편견에 시달리고, 재정적 지원이 부족한 점이 진짜 문제의 근원”이라고 말했다.
랑그바드는 성소수자이기도 하다. 그는 레즈비언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부모에게 밝히는 데도 어려움을 겪었다. 그는 “부모로부터 배제의 시선을 받을 땐 내가 두 번 소수자가 되는 자리라고 느꼈다. 덴마크에선 동성혼이 합법화됐고, LGBTQ의 권리가 잘 보장되는 편이다. 모국의 소수자성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랑그바드는 백인이 압도적 다수인 덴마크에서 한국계 입양아였고, 여성이었으며, 성소수자였다. 그의 ‘마이너리티’는 자연스레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그의 첫 시집에서 그는 국가 간 입양에 관한 문제 뿐 아니라 인종차별, 난민 등의 이야기에 대해서도 썼다.
“저는 덴마크에서도 소수자였고, 한국에서도 늘 소수자였다고 느낍니다. 항상 아웃사이더였기에 조용히 관찰하고 배우는 지점도 있었어요. 저의 정체성 자체가 하이브리드(혼종)이고, 때문에 저의 글쓰기도 하이브리드일 수밖에 없습니다.”
책은 한 편의 장시로도, 여러 입양아의 다성적인 서사를 들려주는 소설이기도, 국가 간 입양에 대한 한 편의 논픽션 보고서이기도 하다. 반복되는 “그 여자가 화가 난다”는 문장이 만들어내는 리듬과 운율을 타고 입양산업뿐 아니라 사회 주류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 인종차별과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 등 사회구조를 향해 슬프고도 날카로운 분노를 쏟아낸다.
이 책은 덴마크에서 2014년 출간돼 반향을 일으켰다. 입양문제에 대한 사회적 이슈화도 함께 이뤄졌다. 입양아가 랑그바드와 같은 성인이 되서 발언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랑그바드는 “이 책은 처음부터 한국 독자를 위해 썼다”고 말했다.
“2007년 한국에서 다양한 입양아들을 만나며 중요한 변화를 겪었어요. 양부모·친부모의 관계도 달라졌고, 스스로를 보는 렌즈도 달라졌습니다. 어릴 땐 주변에 온통 백인밖에 없어서 스스로를 백인이라고 생각했어요. 이젠 내가 백인이자 한국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책을 쓰는 과정도 큰 영향을 미쳤어요. 책의 한국어 출간이 한 시절을 끝맺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랑그바드는 ‘가족’ 개념의 확장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저의 양모도 싱글맘이었다. 어머니와 단 둘이었지만 충분하고 완전한 가족이었다. 오늘날 가족의 개념을 재확립하는 게 필요하다. 우리가 선택하는 친구, 가까운 동료들과 다양한 형태의 가족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랑그바드는 김혜순 시인의 시집 <죽음의 자서전>을 덴마크어로 번역하기도 했다. 김혜순 시인은 <그 여자는 화가 난다>에 추천사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들이여, 자 이제, 우리의 진실을 마주할 준비를 하라. 우리가 전 세계에 버린 아이들이 돌아왔다.(…) 한국인들이여, 우리가 신봉하는 국가주의, 민족주의, 가족주의, 혈연주의, 순결주의, 가부장제가 어떻게 우리의 아이들을 비참의 고통에 몰아넣었는지 바라보라.(…) 우리는 이 노래를 세이렌의 음성처럼 뱃전에 몸을 묶고 들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