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 약속처럼…사라졌지만 어딘가에 있을, 우리 곁의 존재들

유수빈 기자
[그림책]“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 약속처럼…사라졌지만 어딘가에 있을, 우리 곁의 존재들

버섯 소녀
김선진 글·그림
오후의 소묘 | 52쪽 | 1만7500원

버섯은 갑자기 나타났다가 쉽게 사라진다. 이 때문에 옛사람들은 버섯을 요정이라 여기기도 했다. 작가는 폭우가 쏟아진 다음 날 산책길에서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하얀 버섯을 발견했다. 돌아오는 길, 반나절의 뜨거운 햇빛 속에서 버섯은 어느새 자취를 감췄다. 잠깐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져버린 ‘순간의 요정’ 이야기는 그렇게 태어났다.

이끼 숲 오래된 나무 곁의 버섯 소녀는 먼 곳에서 온 새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세상을 향한 호기심을 키워나간다. 고목의 나뭇잎 아래서 곤충들과 함께 지내던 소녀는 스스로 바람을 일으켜 날개를 펼치고 숲을 날아간다. “폭우가 오기 전에 먼저 가서 기다릴게.” 바람 한 점 없던 여름의 공기를 지나 길의 끝에 다다르자 세차게 비가 내린다. 버섯 소녀는 여정의 끝에서 빗속에서 ‘흩어지고 흘러’ 물거품처럼 방울방울 사라진다. 하지만 ‘사이사이 스며들어’ 있다. 촉촉한 땅 위에도, 붉게 물든 꽃들 사이에도. 비가 그친 꽃밭에는 홀연히 나타난 버섯 소녀‘들’이 다시 한번 사라진다. “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림책]“먼저 가서 기다릴게” 그 약속처럼…사라졌지만 어딘가에 있을, 우리 곁의 존재들

작가는 버섯 소녀의 짧은 시간을 조각조각 나눠 생의 여정으로 풀어냈다. 버섯 소녀는 키 큰 나무들로 빽빽한 숲속에서는 깊이 외롭고, 끝없이 이어졌으면 하는 꽃길에선 황홀함에 취한다. 소녀는 그토록 궁금해했던 ‘하얀 바람의 촉감과 바위 아래, 수풀 사이, 호수 바닥의 노래와 단어들, 깊은 동굴의 어둠, 꿀의 맛, 붉은 꽃의 향기’를 느끼고 배우고 맛본다. 그리고 그 소녀를 기다리는 건 이미 먼저 가서 있는 또 다른 소녀들이다.

비 온 뒤 축축한 공기에 적셔진 듯 경계가 모호한 일러스트가 인상적이다. 내리는 비를 가는 선으로 그려내고 알알이 떨어지는 푸른 빛 동그라미들로 빗방울을 표현한 장면은 버섯 소녀의 모험에 생생함을 더한다.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듯, 연약해 보이는 선들과 넉넉한 여백은 아련하면서도 몽환적인 분위기를 전한다.

비 내리는 여름 우산을 닮은 버섯 포자의 여정을 따라가 보면, 분명 사라졌는데 어딘가에 남아 있을 버섯 소녀들의 존재를 믿고 싶어진다.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는 버섯 소녀의 약속을 품고 책장을 넘기다 보면 문득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미래에서 기다릴게” “응, 금방 갈게 뛰어갈게”라고 말하는 애니메이션이다. 영화 <시간을 달리는 소녀>처럼 ‘버섯 소녀’는 시간을 건너서도 결국 자리하는 존재들을 생각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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